[그 영화 어때] 죽은 아이가 AI로 돌아온다면, ‘상자 속의 양’

백수진 기자 2026. 6. 13.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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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상자 속의 양' /NEW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백수진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211번째 레터는 10일 개봉한 영화 ‘상자 속의 양’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열 번째 칸 영화제 초청작이자, 올해 경쟁 부문 진출작이기도 한데요. ‘공기인형’(2010) 이후 정말 오랜만에 선보이는 고레에다표 SF입니다. 언뜻 보면 휴머노이드가 등장하는 SF지만, 그 상자를 열어보면 역시나 아이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인간의 연약한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요즘은 ‘디지털 불멸’의 시대라고 하죠. 세상을 떠난 가수의 목소리를 되살려 신곡을 만들고, 고인이 된 배우를 AI로 재현해 영화에 출연시키는 일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대로, 죽은 사람을 되살려도 되는 걸까요. ‘상자 속의 양’은 이런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영화 '상자 속의 양' /NEW

드론이 날아다니며 택배를 배달하는 근미래. 건축가 오토네(아야세 하루카)와 그의 남편 켄스케(야마모토 다이고)의 집에 상자 하나가 배달됩니다. 휴머노이드 렌털 업체 ‘리버스(Rebirth·환생)’의 홍보물. 음성과 이미지, 각종 데이터를 보내면 생성형 AI와 로봇 공학을 이용해 고인과 꼭 닮은 휴머노이드를 만들어줍니다.

부부는 2년 전 뺑소니 사고로 일곱 살 아들 카케루를 잃었습니다. ‘리버스’의 광고를 보고 마음이 흔들린 엄마 오토네는 렌털 서비스를 신청합니다. 얼마 뒤 아들의 얼굴과 목소리, 기억을 그대로 지닌 로봇 카케루(쿠와키 리무)가 집 앞으로 배송됩니다.

영화 '상자 속의 양' /NEW

한 가지 귀여운 설정은, 이 휴머노이드는 부모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전원이 꺼지고, 때마다 네모난 상자 위에 앉아 전기를 충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오토네는 정말 아들이 돌아온 것처럼 카케루를 기쁘게 맞이하지만, 켄스케는 로봇 청소기와 뭐가 다르냐며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출발만 보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A.I.’와 비슷해 보이지만, ‘상자 속의 양’은 AI보다는 AI와 함께 살아가는 인간에 초점을 맞춥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줄곧 상실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을 다뤄왔습니다. 이번에도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기술보단, 그렇게라도 그리움을 달래보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줄거리만 보면 눈물 펑펑 쏟을 것 같지만, 슬픔은 의외로 절제돼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감정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저는 오히려 그런 담담함이 이 영화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슬픔과 웃음이 한 가족의 일상 안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습니다. 천진난만한 카케루와 아빠 켄스케의 케미스트리 덕에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요.

'상자 속의 양'

영화의 제목은 소설 ‘어린 왕자’에서 따왔습니다. 소설 속 조종사는 어린 왕자의 부탁으로 양을 여러 번 그려주지만, 어린 왕자는 번번이 이건 내가 원하는 양이 아니라며 퇴짜를 놓죠. 결국 조종사는 상자 하나를 그려주며, 이 안에 네가 원하는 양이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어린 왕자는 그제야 만족하며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양을 상상합니다.

로봇 카케루도 어른들의 바람을 투영하는 작은 상자가 됩니다. 부모는 아이에 대한 그리움, 사고를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 다시 행복한 가족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그 안에 욱여넣습니다. 그러나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카케루도 어느 순간부터 부모가 만들어놓은 상자를 벗어나려 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묻고,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가족에 균열이 생깁니다.

영화가 그리는 인간과 AI의 차이도 눈여겨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상자 안의 양을 상상하는 마음, 보이지 않는 존재를 그리워하는 마음, 정답을 찾기보다 고민하는 과정을 즐기는 태도. 영화는 그런 ‘인간적’인 것들로 가득합니다. AI를 둘러싼 불안과 피로가 잠시 누그러지는 듯한 느낌도 들고요.

영화 '상자 속의 양' /NEW

물론 전작들처럼 밀도 높은 가족극을 기대한다면 많이 아쉬울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AI의 윤리, 부모와 자식의 관계, 자연과의 공존까지 여러 주제를 한꺼번에 품다 보니 매끄럽게 연결되진 않더라고요. ‘괴물’이나 ‘어느 가족’에 비하면, 이야기가 충분히 깊어지지 못하고 갈수록 초점이 흐려집니다. 칸 영화제에서 혹평을 받은 이유도,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작들의 무게나 고레에다 감독에 대한 기대를 조금 내려놓고 본다면, 충분히 흥미롭고 사랑스러운 영화입니다. 그만의 온화한 SF를 보는 즐거움이 있으실 거예요. 자기만의 색깔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감독의 신작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반가우니까요. 그럼 이번 레터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는 세상의 창이고 호수이며 거울. 여러분을 그 곁으로 데려다 드립니다.
그 영화 어때 더 보기(https://www.chosun.com/tag/cinema-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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