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흐르는 바다, 멈춰 있는 왕조의 시간… 또 다른 베트남을 만나다

랑코·후에(베트남)/김연주 기자 2026. 6. 13.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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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휴양과 역사가 공존하는
랑코·후에 여행
산비탈에 자리 잡은 반얀트리 랑코의 씨뷰 풀빌라. 객실 테라스에 서면 산자락과 푸른 바다, 하늘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해시컴퍼니

목적지가 베트남 다낭 인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8년 전 가족 여행의 추억이 떠올랐다. 단체 관광객이 끊이지 않던 바나 힐, 떠들썩한 호이안 밤거리, 쉴 새 없이 들려오는 한국어 소리. ‘경기도 다낭시’란 말을 실감하고 돌아온 여행이었다.

지난 4월 다시 다낭국제공항에 내렸다. 입국 공항만 같았을 뿐, 완전히 다른 베트남 중부를 경험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灣)’ 중 하나로 꼽힌 랑코(Lang Co) 지역과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수도 후에(Hue)를 다녀왔다. 랑코는 자연에 둘러싸인 쾌적한 리조트에서 느긋한 휴가를 보내고 싶을 때 딱 맞는 선택지다. 다낭과 후에 사이에 위치해 호이안 올드타운, 후에 왕궁, 미선 유적지 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3곳을 둘러보기 편한 점도 장점이다. 랑코에서 휴양이 충분하다고 느낄 때쯤 가까운 후에로 가서 한나절 역사 기행을 다녀왔다.

다낭에서 ‘하이반 터널’을 통해 후에까지

베트남 지도를 보면 남북으로 길게 뻗은 국토의 허리쯤에 랑코와 후에가 있다. 다낭국제공항에 내려 차로 북쪽을 향해 1시간쯤 달리자 푸른 바다와 쯔엉선 산맥이 어우러진 랑코 지역이 나타났다. 앞을 바라보면 해변이, 뒤를 돌아보면 울창한 산림이 펼쳐지는 독특한 풍경의 배산임수 지형이다. 반얀그룹이 2012년 이곳에 자매 리조트인 앙사나 랑코와 반얀트리 랑코를 지었다.

리조트가 생기기 전엔 외부에서 들어가는 도로 하나 없는, 그야말로 고깃배로 낚시해 생계를 이어가는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런 곳에 창업자 호권핑 회장이 직접 배를 타고 들어가 둘러보고는 리조트 부지로 낙점했다. 아마도 독특한 배산임수 지형 때문이 아닐까. 다오 호앙 리조트 매니저는 “반얀트리 랑코의 가장 특별한 점은 바로 경치”라면서 “뒤쪽은 산이고 앞은 해변인 이런 곳은 매우 드물다”고 말했다.

다낭에서 랑코로 가는 대표적인 길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아름다운 해안 도로를 즐길 수 있는 ‘하이반 고개’다. 해발 500m의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며 내려다보는 랑코만의 전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다른 하나는 베트남에서 가장 긴 ‘하이반 터널’을 이용하는 것이다. 터널 덕분에 산을 빙글빙글 돌아갈 필요 없이 곧장 랑코 지역에 갈 수 있다. 2021년엔 제2 터널까지 확장 개통했다. 이번 여행에선 하이반 터널을 이용해 1시간 만에 랑코에 도착했다.

석양이 지는 프라이빗 해변에 만찬 테이블이 차려졌다. /해시컴퍼니

3㎞의 프라이빗 해변

두 리조트 중 앙사나 랑코에 먼저 묵었다. 이 리조트는 길이 3㎞에 달하는 프라이빗 해변을 품고 있다. 객실 바로 앞이 해변이기 때문에 원할 때 언제든지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구조다. 하지만 ‘바다는 바라보는 것이며, 수영은 수영장에서’라고 믿는 나 같은 사람에겐 야외 유수풀이 천국이었다. 길이가 무려 300m에 이르는 ‘메가 프리폼 리조트 풀’이 리조트를 굽이굽이 감싸며 흐른다. 튜브에 몸을 싣고 열대 정원 사이를 둥둥 떠다니고 있으니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리조트 측은 ‘101 즐길거리(101 Things To Do)’를 자랑거리로 내세웠다. 요가부터 제트스키·패들보트·패러세일링 등 각종 수상 스포츠, 자연 탐방, 산악자전거까지 리조트에서 할 수 있는 액티비티 종류가 101개나 된다는 뜻이다. 그중 몇 개 골라 참여했다. 먼저 고깔 모양의 베트남 전통 모자 ‘농 라’ 꾸미기. 초록 물감으로 리조트에서 만난 도마뱀들과 산·바다를 그려넣었다. 그냥 기념품으로 간직할까 했는데, 가볍고 해가 잘 가려져서 여행 내내 쓰고 다녔다.

우거진 녹음 속 요가를 하는 사람들. /해시컴퍼니

바다에선 안전요원과 함께 제트스키를 탔고, 리조트 내 950m 길이 운하를 카약을 타고 건넜다. ‘선상 쿠킹 클래스’에도 참여했다. 베트남어로 ‘고이 부오이’라고 불리는 포멜로 샐러드를 직접 만들었다. 동남아 과일 포멜로는 자몽과 비슷하지만 쓴맛이 적고 달콤한 맛이 특징. 포멜로 과육에 데친 새우와 허브, 땅콩을 넣고 새콤달콤한 소스를 곁들여 완성했다. 상큼한 포멜로에 고소한 땅콩, 향긋한 허브가 어우러져 더운 날씨에 입맛을 돋우는 맛이었다.

리조트 손님들은 대부분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가족 단위 여행객이었다. 온 가족이 안전하게 쉴 수 있고,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액티비티도 많은 덕분이다. 리조트에는 전문 인력이 돌봐주는 가운데 아이들이 그림 그리기와 공예 등 다양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레인저 키즈 클럽(Rangers’ Kids Club)’도 있다. 아이 둘과 함께 온 영국인 부부는 “부활절 휴일(4월 5일)을 맞아 날씨 좋은 베트남 중부로 휴가를 보내러 왔다”고 했다. 리조트 측은 “방문객은 특정 국가나 지역에 편중되지 않고 매우 다양하다”면서 “한번 오면 3주씩 머물며 휴양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투숙객들은 앙사나 랑코의 4개 레스토랑·바(bar)와 자매 리조트인 반얀트리 랑코의 4개 레스토랑·바를 함께 이용할 수 있다.

리조트 바로 옆에는 메이저 6승에 빛나는 영국의 프로 골퍼 닉 팔도(Faldo)가 설계한 18홀 챔피언십 코스 ‘라구나 골프 랑코(Laguna Golf Lang Co)’가 있다. 해안선을 따라 코스가 조성돼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다양한 샷을 즐길 수 있는 세계적 수준의 골프 코스로 평가받는다. 코스 중간중간 물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새들이 벌레를 잡아먹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미쉐린 2키’ 반얀트리 랑코

반얀트리 랑코는 앙사나 랑코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갖고 있는 리조트다. 앙사나 랑코가 아이들과 함께 각종 액티비티를 즐기고 싶은 가족에게 제격이라면, 반얀트리 랑코는 조금 더 조용하고 프라이빗한 분위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전체 89개 객실이 모두 풀빌라인 반얀트리 랑코는 지난해 ‘미쉐린 키(MICHELIN Key)’ 셀렉션에서 2키(key)를 받았다. 음식점을 평가해 수여하는 ‘미쉐린 스타(별)’와 달리 ‘미쉐린 키’는 세계 각국 호텔이 대상이다. 1~3키를 부여하며, 건축·인테리어 디자인의 우수성, 서비스 품질, 지역사회나 환경에 대한 기여도 등을 보고 선정한다.

반얀트리 랑코의 라군 풀빌라. 계절에 따라 만발한 연꽃을 볼 수 있다. /해시컴퍼니

반얀트리 랑코엔 연꽃이 만발하는 정원을 품은 ‘라군(lagoon) 빌라’, 해변을 바라보는 ‘비치(beach) 빌라’ 등 8종류의 빌라가 있다. 그중 언덕 위 ‘시뷰(seaview) 풀빌라’에 묵었다. 높은 산비탈에 빌라들이 자리 잡고 있다. 필요할 때마다 버기카(모래·자갈이 많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레저용 차량)를 불러 해변이나 식당을 가면 되는데, 언덕길을 지그재그로 오르내리며 보이는 빌라들의 모습 자체가 장관이다. 객실 테라스에 나서면 울창한 열대 숲과 산자락,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수심 1.3m의 인피니티 풀에 들어가 푸른 바다를 바라보니 별다른 명상 없이도 무념무상 상태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여행지에선 느지막이 일어나는 편이지만, 여기선 일출을 꼭 봐야 한다는 말을 듣고 새벽부터 일어나 거실 커튼을 걷었다. 저 멀리 바다 위로 해가 떠오르고 바다에 황금빛 윤슬이 그려졌다.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시간이 궁금해졌다. 스마트폰을 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무언가를 이렇게 가만히, 오랫동안 바라본 적이 최근에 있었나 싶었다.

반얀트리 웰빙 풀 빌라에서 요가하는 모습. /해시컴퍼니

객실에 있는 동안 줄곧 숲 속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온갖 종류의 새 소리가 들린 덕분이 아닐까. 알고 보니 리조트 인근에 조류 보호구역이 있고 360종이 넘는 새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새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기 위해 리조트를 찾아오는 탐조가들도 많다. 리조트 한편엔 이 지역에서 촬영한 새들의 사진을 전시하는 갤러리도 있다. 리조트 측은 “단순한 휴양을 넘어 지역 생태계를 보전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했다.

반얀트리에서 스파를 빼놓을 수 없다. 프라이빗 빌라에서 전문 테라피스트에게 스파 서비스를 받았다. 반얀트리 스파의 테라피스트들은 모두 방콕에 있는 ‘반얀트리 스파 아카데미’에서 수백시간의 전문 훈련을 받은 인력들이다. 지역에서 조달한 천연 오일과 허브 제품을 사용한다.

베트남 중부의 고도 ‘후에’

리조트에서 이틀간 푹 쉬고, 셋째 날 후에로 갔다. 랑코에서 후에까지는 차로 1시간 정도 걸린다.

후에는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가 수도로 삼은 역사적 도시다. 응우옌 왕조는 1802년부터 1945년까지 베트남을 통치했다. 도시 전체가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 경주와 자주 비교된다.

후에 탐방의 중심은 ‘후에 왕궁’이다. 약 150년간 13명의 왕이 머물며 통치한 곳이다. 성채 초입에는 왕조의 깃발을 달았던 높이 37m의 깃발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성은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여 있는데, 성벽 곳곳에 포탄 자국이 남았다. 프랑스군 침공(1885년), 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7년), 그리고 베트남 전쟁(1968년)까지, 세 차례 큰 전쟁이 휩쓸고 간 상처다.

성의 정문인 오문을 통과해 다리를 건너면 황제 즉위식, 사신 접견 등 공식 행사가 열렸던 태화전이 나타난다. 노란색 기와 지붕과 붉은 기둥, 화려하게 조각된 용 문양이 당시 황권의 위엄을 보여준다. 궁 내부 많은 전각들이 베트남 전쟁 때 소실돼 지금까지도 계속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한국의 경복궁처럼 베트남 전통 의상 아오자이나 황실 의복을 입고 황금빛 궁궐을 거닐며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멋진 사진을 남기고 싶으면 궁에 들어가기 전 길거리 가게에서 전통 의상을 빌려 입고 가자.

후에 왕궁에서 아오자이를 입고 있는 관광객. /김연주 기자

후에 왕궁을 1시간 정도 둘러본 다음 ‘카이딘 왕릉’으로 향했다. 후에에 있는 여러 왕릉 중에서도 응우옌 왕조의 12대 황제 카이딘(재위 1916~1925)의 능은 매우 특이한 사례로 꼽힌다. 이전 황제 두 명이 프랑스 지배에 반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지지하자 프랑스 식민정부는 이들을 강제 폐위시키고 1916년 카이딘을 황제로 옹립했다. 친프랑스적인 카이딘 황제의 성향이 능에서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다른 왕릉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서양 건축 양식이 도입됐고, 역대 왕릉 가운데 가장 호화롭고 아름답다는 평이다. 전국에서 모인 숙련공과 장인들이 1920년부터 1931년까지 11년에 걸쳐 지었다.

왕릉 입구부터 이어지는 127개에 달하는 가파른 돌계단이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이 계단을 오르는 과정이 황제의 절대 권력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라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계단 위에는 황제를 지키는 문무백관과 말, 코끼리 석상이 도열해 있었다. 좌우 측엔 황실 수호자들을 위한 전각이 배치됐다.

왕릉의 핵심 건축물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천정궁’이다. 콘크리트 건물 외관은 거무스름한데, 내부는 굉장히 화려하게 장식돼 있었다. 벽면에는 도자기 파편과 유리 조각을 정교하게 박아 넣어 모자이크를 만들었다.

카이딘 왕릉 내 천정궁. 콘크리트 외벽은 거무스름하지만, 안쪽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김연주 기자

중앙 홀 깊숙한 곳에는 프랑스에서 1922년에 만든 카이딘 황제의 실물 크기 청동상이 있다. 그 아래에 황제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황제 머리 위 천장엔 용이 구름 속을 노니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가이드는 “카이딘 황제릉은 풍수지리적으로 훌륭한 곳에 지어졌다”고 설명했다. 앞쪽 작은 산은 자연적인 보호막 역할을 하고, 양옆에는 ‘청룡’과 ‘백호’ 역할을 하는 작은 산이 있다는 것이다. 고대 1000년간 중국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풍수지리 사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동양과 서양 문화가 오묘하게 섞여 있는 카이딘 왕릉에서 왕조 몰락기에도 영원한 영광을 꿈꿨던 황제의 집념을 느낄 수 있었다.

[ 후에에 가면 ‘분 보 후에’와 ‘소금 커피’ ]

후에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들

후에는 왕조의 수도였던 만큼 궁중 음식이 발달한 곳이다. 궁중 음식이 일반 대중 음식에도 영향을 줘 전반적으로 미식 문화가 발달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후에 음식으로 많은 이가 ‘분 보 후에’를 꼽는다. 베트남 쌀국수 하면 흔히 떠오르는 것은 북부 하노이식 ‘포’. ‘분 보 후에’는 ‘후에식 소고기 쌀국수’라는 뜻으로, ‘포’와 달리 빨간 국물이 특징이다. 얼큰하면서 새콤한 맛이 나고, 레스토랑에 따라 게살 완자나 선지를 넣기도 한다.

후에식 소고기 쌀국수 ‘분 보 후에’. /해시컴퍼니

이 밖에도 작은 종지 위에 얇게 쪄낸 쌀가루 반죽을 얹고 새우 플레이크와 바삭한 돼지 껍질 등을 토핑으로 얹은 ‘반베오’, 쌀가루 반죽 위에 돼지고기와 새우를 얹고 바나나 잎으로 싼 후 쪄낸 ‘반남’ 등도 유명한 후에 음식이다.

식사 후엔 ‘소금 커피’를 마시러 가야 한다. 소금 커피는 2010년쯤 후에의 작은 카페에서 개발된 커피다. 이후 인기를 끌며 지금은 베트남 전역으로 퍼졌다. 베트남 스타벅스가 자체 소금 커피를 출시했을 정도다. 연유가 들어간 커피 위에 소금과 크림을 얹어 만든다. 너무 짜지 않을까 했는데 짠맛이 커피의 쓴맛과 연유의 단맛을 적당히 눌러주는 정도였다. ‘단짠단짠’한 맛이 중독성이 강해 한 잔을 금세 다 비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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