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자·아리랑 타고…더 짙어지는 K발레

유주현 2026. 6. 1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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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발레 전성시대
K발레가 파죽지세다. 연초 로잔 콩쿠르 결선 진출 6명 전원 스칼라십 본상 수상, 최근 막내린 YAGP(유스아메리카그랑프리) 콩쿠르 3년 연속 한국 발레리노 우승 등, 무용수들의 기량은 정점을 찍었다. 다음 스텝은 글로벌 무대에 유통될 만한 레퍼토리 개발. 발레계에 전에 없던 창작 열풍이 부는 이유다. 3년째 전국투어 매진 신화를 기록하고 해외 투어까지 나선 신생 민간발레단 윤별발레컴퍼니의 ‘갓’이 도화선이 됐다. 창단 2주년을 맞은 서울시발레단의 ‘인 더 뱀부 포레스트’를 포함해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한꺼번에 3편의 전막 창작발레가 초연되며 상반기 발레 시즌을 달궜다. 정구호 연출의 ‘테일 오브 테일즈’, 박훈규 연출의 ‘발레 아리랑’까지, 각각 전혀 다른 색깔로 K발레의 한계없는 진화를 예고했다.

지난달 대한민국발레축제가 K발레의 상징인 유니버설발레단 ‘심청’ 40주년 공연으로 막을 열었다. 1986년 한국 발레 최초의 글로벌 협업 프로젝트로 탄생한 전막 창작발레로, 12개국 40여개 도시에서 선보였고 국내서도 스테디셀러로 정착했다. 그러나 ‘심청’ 이후 성공한 창작발레는 드물다. 유니버설의 또 다른 작품 ‘춘향’(2007), 국립발레단의 ‘허난설헌-수월경화’(2017) 정도가 아직 살아있는 전막 레퍼토리다. 기존 작품들은 서사가 뚜렷한 네오클래식 스타일의 드라마발레를 추구했지만, 2026년의 K발레는 다르다. 강렬한 미장센, 고유한 신체언어와 개성적인 음악을 무기로 K만의 ‘색깔있는’ 새로운 발레가 탄생하고 있다.

강렬한 미장센, 개성 있는 음악과 안무
서울시발레단 ‘인 더 뱀부 포레스트’. 올 상반기 발레시즌은 장르 경계를 넘어 다양한 협업을 시도한 창작 초연들이 쏟아져 나오며 화제를 모았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국내 유일의 공공 컨템포러리 발레단인 서울시발레단의 신작 ‘인 더 뱀부 포레스트’(5월 15~17일 세종문화회관)는 창단작 ‘한여름 밤의 꿈’(2024) 이후 첫 전막 도전에 국악 콜라보를 내세워 흥미로웠다. 한동안 해외 유명 레퍼토리 소개에 집중하다 드디어 ‘한국적 컨템포러리 발레’ 모색에 나선 것이다.

국악과 컨템포러리 발레의 케미스트리를 빚어낸 안무가는 국립발레단 출신 강효형. 강수진 전 국립발레단장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요동치다’(2015), ‘허난설헌-수월경화’ 등 진작부터 국악 콜라보라는 세계관을 개척한 그로서는 국립과 차별화된 ‘컨템포러리’ 감각이 고민이었을 터. 그의 해답은 ‘힐링’과 ‘사유’라는 추상적인 테마로, 마음이 어지러운 현대인이 자연 속에서 호흡하며 자신을 비우고 질서를 회복하는 서사를 대나무 숲의 고요와 생명력 자체로 은유했다.

속이 비어있는 대나무라는 소재는 중의적이다. 사군자의 하나로 유연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동양미의 상징인 동시에, 고정관념을 비우고 한국춤의 호흡을 채운 새로운 움직임을 개척하겠다는 선언도 된다. 거문고와 밴드 사운드가 만나는 고유한 세계를 구축한 ‘국악계 이단아’ 박다울의 음악이 버팀목이 됐다. 토슈즈 차림으로 익숙한 발레 동작을 하는 2장을 빼면 창작 한국무용이라고 해도 될 만큼 ‘K’의 색깔이 강했다.

서울시발레단 ‘인 더 뱀부 포레스트’. [사진 세종문화회관]
대나무 특유의 수직적 상승감과 여성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완벽하게 동기화되는 2장이 발레 본연의 미감을 극대화했다면, 여성 군무가 토슈즈를 떨어뜨리고 큰 호흡을 토해내는 3장은 발레의 규칙들을 내려놓는 의미다. 그렇게 비워낸 자리에 남성 무용수들이 강렬하고 역동적인 군무로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그리는 4장까지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한국적 컨템포러리 발레’도 이렇게 거침없이 뻗어가게 될까.
서울시발레단 ‘인 더 뱀부 포레스트’. [사진 세종문화회관]
장인주 무용평론가는 “대나무라는 한국적 질감을 무용수들의 거친 들숨날숨으로 표출함으로써 한국적 정서와 컨템포러리 발레를 단순한 외형적 차용을 넘어 단단히 결합시켰다”면서 “후반부 각 장의 구조적 차별화를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한 연출은 아쉽다. 관객의 몰입을 강화할 수 있는 극적 입체감과 시각효과를 다채롭게 변주한다면 서울시발레단의 시그니처 레퍼토리로 정착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구호가 연출한 ‘테일 오브 테일즈’. [사진 대한민국발레축제]
대한민국발레축제도 창작에 진심이다. 초청 공연인 ‘심청’ ‘인 더 뱀부 포레스트’ 외에 통상 갈라로 꾸몄던 기획 공연 2편을 창작으로 돌린 것. 국내 대표적인 비주얼 마스터 정구호가 연출한 ‘테일 오브 테일즈’(5월 23~24일 예술의전당)는 공연 전부터 큰 관심을 모았다. 2012년 국립발레단 ‘포이즈’로 무용 연출에 데뷔했으나 한동안 한국무용 현대화에 집중해 온 정구호는 대표작 ‘일무’를 안무한 현대무용가 김성훈과 함께 특유의 해체주의로 고전 발레를 리모델링했다.

‘발레리나 오딧세이’랄까. 주인공 발레리나가 ‘라 실피드’ ‘잠자는 숲속의 미녀’ ‘지젤’ ‘백조의 호수’ 등 클래식 대표작들을 넘나들며 주요장면을 관통하는 테크닉, 파드되와 군무 등 전막 발레의 미학적 정수를 뼈대 삼아 재창작한 무대다. 한국무용에서도 감정을 걷어낸 ‘춤을 위한 춤’을 추구했던 정구호 연출은 “사랑과 분노, 상실의 감정 터널을 거치며 클래식 발레가 여성 무용수에게 요구해 온 수동적인 정서를 뒤집고 주체적인 자아로 도약하는 해방의 서사”로 고전 발레의 ‘감정’에 도전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뺀 2~5장은 고전발레의 클리셰와 같은 감정들을 대변한다. ‘라 실피드’ 솔로로 누군가를 향한 ‘갈망’에서 출발해,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오로라 공주 파드되로 ‘순응’을, ‘지젤’ 윌리들의 군무로 애절한 ‘사랑’을 거쳐 ‘백조의 호수’ 3인무로 감정의 ‘붕괴’에 도달하고, 에필로그에서 앞서 등장한 네 발레리노에 얽힌 감정을 32회전 푸에테로 걷어차 버리고 ‘초월’을 선언한다.

정구호가 연출한 ‘테일 오브 테일즈’. [사진 대한민국발레축제]
클래식에 대한 오마주로 보이기도 한다. 흑백의 대비, 강렬한 포인트 컬러로 대변되는 ‘정구호 미니멀리즘’이라는 포장지 안에 ‘반박불가’ 아름다운 음악과 테크닉이 굳건하기 때문이다. 컨템포러리가 외면하기 쉬운 ‘정형화된’ 테크닉들은 발레리나와 발레리노가 버텨온 시간을 ‘리스펙트’하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고전 발레를 극복하면서도 여전히 발레라는 정체성과 그 감동의 핵심을 제대로 표출한 영리한 접근법이다.

한국무용의 환골탈태를 이끈 정구호를 다시 발레 신으로 초대했다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 내부자들만 고민할 게 아니라, 경계를 파괴하고 외연을 넓힐 때 무용에 새로운 감각을 주입할 수 있다는 걸 정구호가 이미 증명해왔다. 심정민 무용평론가는 “디자이너와 현대무용가와의 협업으로 표현의 지평을 넓히려는 노력이 긍정적이고, 김지영 같은 올드보이를 중심에 세워 향수를 자극한 점도 좋았다”면서 “세련된 의상과 미장센에 걸맞게 엣지있는 라인을 가진 젊은 에너지의 무용수를 더 많이 세웠다면 버라이어티하고 협업도 더 돋보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수진·이루다가 안무한 ‘발레 아리랑’. [사진 대한민국발레축제]
‘발레 아리랑’(6월 6~7일 예술의전당)은 더 적극적으로 경계를 허물었다. 대중음악 신에서 남다른 감각의 무대연출로 일가를 이룬 미디어아티스트 박훈규 중심의 사운드·미디어아트 그룹 ‘무토(MUTO)’가 ‘이제껏 본 적 없는 발레’를 표방하고 나섰다.

무토가 판소리 심청가를 재해석했던 ‘두 개의 눈’ 무대에 반한 김주원 발레축제 예술감독이 발벗고 나서 최수진, 이루다 안무가와 협업을 주선했다. 김주원 감독은 “K발레가 글로벌로 나갈 만한 창작 레퍼토리 개발이 필요한 지금, 아리랑을 현시점에 맞게 재해석한 한국적인 무대를 기획했다”면서 “무토는 발레와 무관했던 팀이지만 디지털 이미지나 대중가수 공연에서 보여준 강렬하고 스피디한 연출이 느리고 아날로그한 예술인 발레의 매력을 확장시켜 줄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최수진·이루다가 안무한 ‘발레 아리랑’. [사진 대한민국발레축제]
반전은 ‘아리랑’ 선율이 없다는 것. 아리랑의 한과 극복의 정서만을 차용해 ‘한국인’의 어제와 오늘을 그린 서정적인 무대다. 최수진과 이루다가 각각 안무한 1부와 2부는 색깔 차이가 뚜렷하다. 1부는 거문고를 활로 긁어 현이 우는 듯한 소리로 조성한 진한 슬픔의 정서 속에서 토슈즈를 신은 남녀 무용수들이 발레의 틀을 유지하며 고통과 인내의 춤을 춘다. 무용수들의 실루엣을 거대한 LED 기둥에 투사해 만든 이미지까지, 아름답지만 어딘가에 갇혀있는 답답한 모습이다. 정옥희 무용평론가는 “식민지배, 전쟁, 분단을 관통하는 민족사의 거대한 흐름을 추상적으로 형상화한 발레다. 특정 인물의 서사보다 추상화된 감정과 역동적인 군무를 통해 꿈틀거리는 민족의 삶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한국 넘어 글로벌서도 통할 새 장르로
K발레의 과거와 미래를 펼쳐낸 무대로 보이기도 했다. 1부가 틀에 갇힌 채 쫓아가기에 급급했던 과거라면, 2부는 해방의 춤 그 자체. LED 기둥이 마치 새빨간 용암을 분출하듯 갈라지며 미래지향적인 디지털 이미지를 투사하기 시작하고, 음악은 타악처럼 거문고를 강하게 퉁기는 주법과 태평소의 날카로운 선율로 국악의 색깔을 진하게 드러냈다. 발레와 한국무용, 현대무용 전공자들이 뒤섞여 살풀이춤, 강강술래 같은 한국무용 춤사위를 자유롭게 포용한 진취적인 움직임을 구사했다. 정 평론가는 “발레와 한국춤, 대중춤의 요소가 뒤섞이며 한과 흥이 어우러졌다”고 말했다. K컬처 특유의 색깔 그 자체란 얘기다.

더블빌처럼 구분되는 1·2부를 유일하게 관통한 솔리스트 최지원의 존재감이 상징적이다. K발레를 의인화한 듯, 막이 열릴 땐 외롭게 파닥이고 있었지만 알을 깨고 새빨간 불새로 거듭나 모두를 아우르고 날갯짓을 하는 강렬한 이미지로 막을 닫는다. K발레가 세계로 비상할 시점이라는 뜻이다. K발레를 선도해야 할 국립발레단이 단장 인선 논란으로 정체되어 있는 사이, 창작의 불꽃은 현장에서 타오르고 있다.

유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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