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그만” 수백만장 꽃잎에 질식해 숨졌다…10대 황제가 벌인 최악의 ‘장난’[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로렌스 알마 타데마 편]

이원율 2026. 6. 12.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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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로렌스 알마 타데마
‘엘라가발루스의 장미’ 완벽주의자의 걸작
극적 연출, 사실적 묘사…붓질 헌신한 화가
병 걸려 죽을뻔한 경험…예술이 구원했다
아내 죽자 우울증…하지만 사랑도 열심히
말년에 “한물 간 화가”…그래도 머물렀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엘라가발루스(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일부 확대), 1888, 캔버스에 유채, 132.1x213.9cm, 후안 안토니오 페레스 시몬 컬렉션[i.pinimg.com,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역사와 신화 등 이야기를 일부 담았는데, 기사가 평소보다 약간 더 길어졌습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황제의 ‘장미’,
사람을 죽이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엘라가발루스(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일부 확대), 1888, 캔버스에 유채, 132.1x213.9cm, 후안 안토니오 페레스 시몬 컬렉션[i.pinimg.com,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뿌려, 당장 뿌리라고!
로마 제국의 제23대 황제, 엘라가발루스가 시종 무리를 부추겼다. 이들은 왕좌와 두어 뼘 거리를 둔 채 일렬로 서있었다. 품으로는 자기 몸만한 자루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 안에 넘치듯 담긴 건 장미와 푸른 제비꽃 등이었다. 얼마나 꾹 눌러 담겼는지, 피어오르는 향으로도 몇몇은 벌써 비틀거릴 정도였다. 이제 막 연회장에 오는 의원들을 향해 꽃을 탈탈 털어내라는 것. 엘라가발루스가 킬킬대며 내린 명령은 이것이었다. 시종들은 팔을 찔러넣어 꽃잎을 한 움큼씩 들어 올렸다. 오는 이들에게 힘껏 던지고, 흔들고, 날려보냈다. 붉은색과 보랏빛, 푸른 결이 때를 맞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무희가 음악을 일깨웠다. 황제의 측근들은 여기에 맞춰 시를 읊고 노래를 불렀다. 장관이었다. 꿈보다도 더 꿈같은 진풍경이었다.

그러니까, 아래에서 “그만! 제발 그만!”이라는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나오기 전까지는.

로렌스 알마 타데마, 엘라가발루스(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일부 확대), 1888, 캔버스에 유채, 132.1x213.9cm, 후안 안토니오 페레스 시몬 컬렉션[i.pinimg.com,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손님은 꽃잎을 즐기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깔려 있었다. 눈과 코, 입은 물론 팔다리까지 짓눌려 있었다. 수백만장의 잎은 몸의 모든 곳을 파고드는 모습이었다. 고통 맺힌 신음이 곳곳에서 나왔다. 헐떡이다 숨이 넘어가는 소리도 들렸다. “황제시여, 이제 멈춰주…” 그래봤자 고작 10대였던, 소년 폭군 엘라가발루스는 그 말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직접 생각해낸 ‘장난’이 이러한 재앙을 부를 줄 몰랐기 때문일까. 아니었다. 그저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금방 지루함을 느낀 탓이었다. ‘우아한 비극의 한 장면을 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시끄럽기만 하군.’ 이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었을 터였다.

이것은 4세기경 출판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미상의 글, 《로마황제(Augustan History)》에서 발췌한 일화다.

세계사를 통틀어서도 최악 지도자로 꼽힐 만한 엘라가발루스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확실하지 않다. 과장 또는 완전히 허구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다만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 기괴한 설은 수많은 이의 상상력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팔이 빠질 만큼 그렸을 꽃,
그가 남긴 결과물 중 하나일 뿐
로렌스 알마-타데마, 엘라가발루스의 장미, 1888, 캔버스에 유채, 132.1x213.9cm, 후안 안토니오 페레스 시몬 컬렉션 [Superb magazine, The Désirs & Volupté exhibition, Public Domain, wikimedia.org]

이런 가운데, 네덜란드 출신 화가인 로렌스 알마 타데마도 그 전설 같은 기록에 빠져들었다.

<엘라가발루스의 장미>. 그래서 그림도 그렸다. 세로 1.32m, 가로 2.13m의 묵직한 작품은 언뜻 보면 아름다운 분홍빛의 향연이다. 향기로운 꽃잎 천국에서 황홀한 추억을 쌓아올리는 장면으로도 여겨진다. 하지만 뜯어보면… 엘라가발루스와 그의 친구들은 연단 위 편하게 엎드린다. 장미꽃이 가루처럼 흩날리는 장면을 감상한다. 거기에 파묻혀 쓰러지고, 버둥대고, 허우적거리는 손님의 면면도 음미한다. 압사 또는 질식사를 당하는 그 모습까지. 누군가는 잔을 든 채 눈을 크게 뜨고, 여인들은 이러한 풍경 자체가 감미로운 듯 미소를 머금는다. 경탄은 곧 재앙과 참사가 되고 만다. 알마 타데마는 그림의 사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직접 대량의 장미꽃을 모았다고 한다. 영국에서 작업을 이어가는 동안, 프랑스 남부에서 싱싱한 꽃잎을 배송까지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매주, 그렇게 4개월간 계속.

극적 연출, 상당한 크기와 사실적인 묘사, 팔이 빠질 만큼 붓을 돌려가며 하나씩 그렸을 끝없는 꽃잎.

그림은 은은한 빛과 세밀한 표현으로 아름다움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작품도 작품이지만 이를 만든 화가 또한 결코 만만치 않아보인다.

실제로 그랬다. 알마 타데마. 그는 본인의 예술세계에 대한 무한한 헌신가이자, 그 시절 모두가 알아주는 완벽주의자였다. 오죽하면 구름 한 점조차 대충 그리지 못하는 화가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다고 한다. <엘라가발루스의 장미>는 그런 그가 남긴 결과물 중 하나일 뿐이었다.

시한부 인생에서,
예술로 새로운 삶을 얻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클로비스 자녀들의 교육(복수의 학교), 1861, 캔버스에 유채, 129.5x177.8cm, 개인소장 [Sotheby‘s New York,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원래 알마 타데마는 사실상 시한부 인생이었다.

1836년 네덜란드 프리스란트주의 드론립에서 출생한 알마 타데마는 어릴 적부터 썩 튼튼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에 이어 변호사가 될 생각도 있었다. 잔병치레가 잦아 결국 진도를 맞추지 못했다. 특히나 열다섯에 찾아온, 현재로는 폐결핵으로 추정되는 병에 숨이 넘어갈 뻔도 했다. 몸과 함께 정신적 쇠약까지 겪었기에, 여린 불씨는 침실에서 곧 사그라들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알마 타데마는 그때부터 그림에 신경을 쏟았다. 이것은 그저 취미 활동이었다. 법 공부는커녕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만큼, 당장 마음이 가는 일이나 해보자는 자세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붓을 들면 몸이 아프지 않았다. 머리도 어지럽지 않았다. 단지 기분 탓이라고 볼 수 없었다. 얼굴에 다시 혈색이 돌았다. 팔다리에 살이 붙었다. 이는 기적처럼 보였다. 알마 타데마는 그때부터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예술, 나의 구원자여. 나 또한 앞으로는 그대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로렌스 알마 타데마,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 1885, 패널에 유채, 65.4x91.4cm, 개인소장 [Sotheby‘s New York,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알마 타데마는 열여섯 나이로 벨기에 안트베르펜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는 이후 벨기에 화가 루이 더 태에의 조수로 들어갔다. 이 화가에게서 신화와 역사 등 고전적 주제의 감미로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의 가르침은 간결했다. 상상만으로는 완전히 그릴 수 없다는 것. 즉, 로마를 그리려면 로마부터 알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에게는 큰 깨우침이었다. 그림에는 그 시절 복식부터 풍습, 건축양식 등 철저한 고증이 깃들어야 한다는 점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스승의 자극이 통했을까. 여기에 예술에 대한 부채 의식까지 더해졌을까. 알마 타데마에게는 차츰 강박이 생겼다. 모든 선과 세부 묘사에 민감해졌다. 가령 꽃 한 송이를 제대로 그리기 위해 유럽을 건너 아프리카의 생화까지 구해올 정도였다. 그림을 그리는 만큼 글도 많이 읽었다. 역사서부터 동물과 식물, 옛 건축물이 그려진 귀한 책도 잔뜩 챙겼다. 그뿐인가. 수개월, 길게는 수년을 매달린 작품마저 “완전하지 않다”며 찢거나 덧칠하기 일쑤였다. 공들인 결과물이 좋은 평을 받지 못하자, 이를 잡아뜯어 하인에게 식탁보로 삼으라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봄이 왔으니 꽃을 모으라”,
고대 로마의 봄 축제를 상상하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봄, 1894, 캔버스에 유채, 78.4x80.3cm, 게티 센터 [getty.edu,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알마 타데마가 “이 정도면 괜찮다”고 여긴 그림은 무엇이 있을까.

<봄>. 이는 알마 타데마가 그린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화폭은 제목 그대로 온통 봄이다. 갓 성년을 맞은 남녀와 아직 앳된 소녀들이 행진한다. 활짝 피어난 색채로 꾸민 차림새는 그 자체로 꿈결 같다.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눈빛도 달콤하다. 꽃을 뿌리고, 꽃으로 장식하고, 꽃향기를 마음껏 퍼뜨린다. 플루트와 탬버린, 팬파이프가 노래와 음악을 이끈다. 금속 상자와 주전자, 꽉 찬 꽃바구니와 사티로스 동상은 몽환적인 공기를 더한다. 성스럽다. 화려하지만 평화롭고, 화사하지만 마냥 산만하지 않다. 건축물은 예술 속 예술의 역할을 다한다. 시간의 균열, 세월의 흔적, 이 피할 수 없는 상처 속에서도 저마다의 문양과 조각을 고스란히 품어낸다. “프리아포스(다산과 풍요의 신)여, 당신의 집과 숲이 있는 람프사코스의 이 신성한 땅을 바치고 봉헌하나이다. (…)” 황금색 동판에 새겨진 이 시구가 은은한 분위기를 끌어모은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봄(일부 확대), 1894, 캔버스에 유채, 78.4x80.3cm, 게티 센터 [getty.edu,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이것은 꽃을 모으는 고대 로마의 봄 축제를 상상해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한 점 그림이지만, 어디를 대고 자르든 하나의 완결작이 될 수 있는 결과물. 그랬다. 알마 타데마의 마음에 들려면 이 정도는 돼야 했다. 알마 타데마는 1863년, 스물일곱 나이로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당시 로마와 나폴리, 폼페이 등 도시에서는 옛 유적에 대한 대규모 발굴 작업이 한창이었다. 고대 역사를 각별히 여긴 알마 타데마는 거기에 푹 빠져버린다. 몇 개월간 도시를 탐험하듯 견학한다. 꽃과 풀, 돌과 모래를 수집한다. 아무 곳에서나 깔고 앉아 스케치를 한다. 눈길 끄는 문화재의 크기를 재고, 이마를 대 그것의 탄생과 몰락 순간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봄>은 그 꼼꼼함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런 그림을 놓고 일각에선 “고리타분한 손길”,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하긴 했다. 그러나 화가가 본인의 예술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위해 붓을 놀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고리타분한 행동이지 않겠는가.

가장 위험한, 가장 치명적인 순간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담아내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암피사의 여인들, 1887, 캔버스에 유채, 122.5x184.2cm, 클라크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그런가 하면, <암피사의 여인들>은 어떤가.

…응? 여기는 어디야? 여인들이 잠에서 깬다. 이들은 술의 신 바쿠스를 받드는 무리 마이나스(maenad)다. 얇은 천 위로 맹수 가죽을 두른 채 밤새 취해 춤을 추는 여사제들이다. 포키스(Phocis)의 이 여인들은 그날 밤에도 모였다. 술을 진탕 마셨다. 갖은 주문과 함께 탬버린을 치며 흥을 끌어올렸다. 문제가 생겼다. 흥분해도 너무 흥분하고 만 것이다. 보폭이 커졌다. 움직임도 대담해졌다. 웃고 떠드는 사이 한 번도 가지 못한 곳까지 오고 말았다. 무슨 상관인가. 우선 졸음이 쏟아지니 잠부터….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비몽사몽의 여인들은 하나둘 상황을 알아차린다. 이곳은 포키스의 적대국, 그리스 암피사(Amphissa)의 시장 한복판이었다. 위험했다. 군인이든 경비원이든, 이대로 잡히면 몸을 유린당하거나 최악 상황에선 목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때마침 발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크고, 많고, 빨랐다. 얼빠진 실수로 이렇게 떼죽음을 당하는가 했지만, 들리는 건 뜻밖에도 “괜찮아요?”라는 또 다른 여성들의 물음이었다. “여기 물과 과일을 드세요. 우리가 당신들을 에워싸고 있으니, 군대에 들키기 전에 어서 도망치세요.” 이들은 암피사의 여인들이었다. 아무리 적대국의 사람들이지만, 당장의 아찔한 상황을 딱하게 여겨 관용을 베푼 것이었다. 덕분에 마이나스는 조금의 치욕스러운 상황 없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다. 이는 그리스 역사가 겸 작가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에 쓰인 이야기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암피사의 여인들(일부 확대), 1887, 캔버스에 유채, 122.5x184.2cm, 클라크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알마 타데마는 이 장면 또한 화폭에 옮겼다.

그가 추구하는 사실적 미의 극치를 <봄>에 담았다면, <암피사의 여인들>은 아름다움과 함께 기록상 고증에 있어 강박적 치밀함까지 펼쳐보인 작품이다. 아직 팔다리를 뻗고 잠든 처녀, 몸을 웅크린 채 숙취에 시달리는 여성, 멍한 표정의 몇몇, 이제 막 상황을 파악하고 도움을 청하는가 하면, 일단 기지개부터 올리고 보는 여인… 그런 이들에게 음식과 과일은 건네는 이가 있고, 겹겹이 에워싸 놀라움과 호기심, 나아가 부러움을 표하는 여자들이 있다. 꿀과 달걀, 고기, 생선, 오이 등이 판매대에 깔렸고, 옥상에는 또 한 번 흰색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림은 그 자체로 감상의 즐거움을 주지만, 이야기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힌트를 준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재차 말하자면, 이 정도는 돼야 알마 타데마의 손끝에서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화가는 이 작품으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메달도 받았다.

사랑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림의 폭은 더 넓어졌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미스 안나 알마 타데마(15세의 딸), 1883, 캔버스에 유채, 113x78.5cm, ART UK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모든 일에 열심인 이가 으레 그렇듯, 알마 타데마는 사랑에도 최선을 다했다.

알마 타데마는 1863년, 스물일곱에 안트베르펜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상대는 언론인의 딸, 마리 폴린이었다. 알마 타데마와 폴린은 어디서 만났으며, 어쩌다 인연을 맺었는지에 대해 크게 알려진 게 없다. 확실한 건 두 사람 사이 자식이 셋 있었다는 것이다. 첫째이자 외아들은 몇 달밖에 살지 못한 채 죽었다. 사인은 천연두였다. 또, 1869년에는 폴린이 사망했다. 향년 서른둘. 이번에도 천연두 때문이었다. 알마 타데마는 폴린을 깊이 사랑하고 존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내의 사망 후 우울증에 걸렸다. 의사도 진단하지 못하는 건강 문제로 고통을 받았다. 생의 구원이었던 그림에도 4개월 가까이 손을 대지 못할 지경이었다. 알마 타데마는 그해 영국 런던으로 넘어간다. 지인에게 소개받은 의사를 만나고, 삶의 터전을 바꿔 생을 환기하기 위함이었다. 알마 타데마는 거기서 새로운 세계를 마주했다. 그는 동료 화가의 집에서 붉은 머리칼을 가진 소녀를 봤다. 열일곱 살의 로라 테레사 엡스였다. 사랑은 예상하지 못한 때, 생각하지 못한 모습으로 다시 찾아왔다. 지독한 안개가 그제야 걷히고, 팔다리를 묶은 사슬 또한 드디어 풀리는 기분이었다. 알마 타데마는 예술만큼 사랑에 대해서도 열정적이었다. 사랑 때문에 무너질 수 있었기에, 사랑 덕분에 일어설 수도 있었다. 알마 타데마는 엡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그러는 동안 서서히, 그리고 성실히 그녀와 가까워졌다. 청혼, 이어 결혼. 서른다섯의 신랑과 열여덟의 신부는 그렇게 손을 맞잡았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무의식적 라이벌, 1893, 판넬에 유채, 45.1x62.8cm, 영국 브리스틀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로렌스 알마 타데마, 기정사실, 1885, 패널에 유채, 31.1x22.9cm, 테이트 브리튼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그의 예술은 지금껏 강박적 고증과 치밀한 연구 덕에 더 깊어질 수 있었다.

그런 한편, 그의 예술은 매 순간 모든 것을 쏟아내는 사랑과 정열로 인해 더 넓어질 수 있었다.<무의식적 라이벌>. 알마 타데마는 이런 그림도 그렸다. 빈틈없는 역사화가 아닌, 이처럼 은근하고도 은은한 상상 속 풍속화도 내놓을 수 있었다. 배경은 역시나 고대 로마. 두 여인이 자기만의 스타일로 꾸민 채 빌라 벽에 몸을 대고 있다. 애타는 얼굴의 이들은 똑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의 눈에 먼저 들기 위해 알게 모르게 경쟁을 하고 있을 터였다. 큐피드로 추정할 수 있는 아기 조각상이 이들의 뜨거운 마음을 암시한다. 활짝 피어난 꽃나무 아래 떨어진 잎들은 애타는 심리를 대변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역시나 천장부터 벽, 빛을 받은 대리석과 소품들의 질감까지…. 이야기꾼이라면 이 그림 한 점만으로도 구체적 배경을 둔 여러 갈래의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림 한 점,
시와 문학까지 함께 깃들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더 이상 묻지 말아요, 1906, 캔버스에 유채, 78.8x113.6cm, 개인소장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더 이상 내게 묻지 말아요. 그대와 내 운명은 정해졌으니.
(…)
그대의 손길 한 번에 나는 굴복하나니.

알프레드 테니슨, 《공주》 일부 발췌
<더 이상 묻지 말아요>. 붉은 꽃을 귀에 꽂은 사내가 여인의 손가락에 입을 대고 있다. 푸른 하늘, 푸르른 바다, 푸릇한 천으로 만든 옷과 샌들이 공간의 청아함을 이끈다. 팔을 내어주는 사이 수줍은 듯 고개 돌린 그녀. 앞서 건네받은 꽃다발에 또 한 번 눈길을 준다. 짭짤한 공기가 불어온다. 쇄골은 간지러워진다. 그대도 저와 같은 마음일까요. 그가 묻는다. 그녀가 재차 답할 것이다. 그대여, <더 이상 묻지 말아요>.
로렌스 알마 타데마, 소리 없는 인사, 1889, 캔버스에 유채, 229x30.5cm, 테이트 미술관 [Art UK,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모든 그림에서 높은 밀도감을 추구한 알마 타데마답게,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도 사연을 읽을 수 있었다.

테니슨의 시 ‘공주’와 함께, 여기에는 아쉽게도 해피 엔딩 아닌 또 다른 이야기가 서려 있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화폭 속 남성은 그리스 신화 속 피라무스로 통한다. 여성은 그의 이웃집에 사는 티스베를 묘사했다는 게 통설이다. 피라무스와 티스베는 첫눈에 반한다. 다만, 이는 둘만의 전율일 뿐이었다. 두 가문은 서로를 죽일 듯 미워했다.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어보였다. 청춘의 남녀는 벽틈에서,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몰래 로맨스를 가꾼다. 이제는 이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다. 둘은 말을 맞춘다. 약속의 그날, 오디나무 밑에서 종일 사랑을 속삭이기로 한다. 먼저 온 티스베. 저 멀리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인가? 고개를 들었지만, 보이는 건 이제 막 사냥을 마친 암사자였다. 티스베는 도망친다. 문제는 망토를 놓고 왔다는 것. 암사자는 피 묻은 자기 주둥이로 그것을 짓이긴다. 시간이 흐른다. 부모의 감시망을 겨우 따돌린 피라무스가 나무 아래로 간다. 하지만 보이는 건,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망토뿐. 죄책감에 빠진 피라무스는 해선 안 될 선택을 한다. 뒤늦게 만남의 장소를 다시 찾은 티스베는 그 모습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있더니, 스스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만다. 그러니까, <더 이상 묻지 말아요>는 이들 사이 가장 아름다웠던 한철의 포착이었다. 언젠가부터는 자연스럽게 ‘대리석의 화가’라고 불렸을 만큼, 그림 속 대리석의 표현은 이제 따질 것도 없다. 천의 주름, 단추의 윤기는 물론 티끌만한 손발톱의 형태까지, 화가의 헌신이 들어가지 않은 부분이 없다.

영혼까지 실은 그림,
‘영예의 자리’ 장식하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더 이상 묻지 말아요(일부 확대), 1906, 캔버스에 유채, 78.8x113.6cm, 개인소장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알마 타데마는 1906년에 이 아름답고도 슬픈 그림을 그렸다.

마침 그의 두 번째 사랑이자 최고의 사랑, 엡스가 서서히 힘을 잃어가던 때였다. 이 그림이 유독 시선을 붙드는 건 특유의 완벽주의 덕도 있겠지만 다른 이유 또한 있을 것이다. 화가는 아마, 나의 그녀를 곱씹으며 영혼을 싣고 있지는 않았을지. 작품은 그해 열린 로열 아카데미의 ‘영예의 자리’로 꼽힌 세 군데 중 한 곳을 장식했다. 그리고, 엡스는 3년 후 투병 끝에 사망했다. 화가는 이후 젊은 연인의 로맨스를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 자리 그대로,
그는 자기 화풍과 작별하지 않았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여름의 제물, 1911, 브리검 영 대학교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알마 타데마의 예술을
마티스나 고갱, 피카소의 예술과
조화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화가 존 콜리어
알마 타데마는 전성기 시절 ‘가장 돈을 많이 번 화가’ 중 한 명으로도 불렸다. 그는 자신의 회화관과 작별하지 않았다. 찬란한 햇빛 속 치장한 세계, 보석 같은 꽃과 바닐라 크림을 찍어바른 듯한 대리석을 평생 안고 갔다. 인연은 신의 뜻을 따라야 한다지만, 삶을 구원해 준 그림과 예술만은 내 뜻대로 따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시류에 올라타지 않았다. 인상주의에 이어 표현주의, 야수파와 입체파, 추상회화 등 차츰 고개 드는 새로운 양식 또한 먼저 거부했다. 알마 타데마는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기야, 어느덧 돌아보면 그야말로 한물간 사람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19세기 최악의 화가.” 실제로 예술 평론가 존 러스킨은 그를 이렇게 정의했다. “버번위스키 상자를 장식할 때나 쓸만하다.” 한 비평가는 어느덧 노쇠해진 그에게 이런 식의 조롱도 남겼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고집했다. 꼼꼼한 장식과 철저한 고증, 꿈꾸듯 피어나는 옛 세계와 아름다운 이야기를. 무슨 상관인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흐트러짐은 없었다. 그것이 그가 평생을 다져온 의무이자 의리였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운이 좋은 사람, 1895, 패널에 유채, 53.7x36.8cm [Sotheby´s,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알마 타데마는 1912년에 영영 눈을 감았다.

요절의 문턱까지 갔던 소년은 일흔여섯까지 세상을 향유할 수 있었다. 사망 후 명성에는 짙은 안개가 깔렸다. 각 시대의 화풍, 각 화가의 개성과 신념을 주목하는 비교적 최근에서야 그는 재차 빛을 마주할 수 있었다. 갑갑했던 고집쟁이가 아닌, 완벽과 헌신을 최우선에 둔 그 시절의 마지막 등불 격으로. 그는 여러모로 성공한 화가였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참고 자료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뢰브 고전 도서관 시리즈(penelope.uchicago.edu)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 민음사

플루타르코스, 모랄리아, 한길사

Ash, Russell., Alma-Tadema, Shire Publications

Ash, Russell., Sir Lawrence Alma-Tadema, Pavilion Books

Barrow, Rosemary., Lawrence Alma-Tadema, Phaidon Press Inc

로렌스 알마 타데마, 전망 좋은 곳, 1895, 패널에 유채, 63.8x44.7cm [Christie‘s, LotFinder,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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