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윤의 길을 걸으며] [33] 가난해도 태산보다 큰 사람

요즘 밤마다 ‘겐지 이야기’를 조금씩 읽고 있다. 11세기에 교토의 궁궐에서 일하던 무라사키 시키부라는 궁녀가 쓴 연애 소설이다. 일본에서는 이런 고전 소설을 시대마다 사랑받는 작가가 새로 번역하곤 하는데, 가장 최근 버전은 ‘종이달’을 쓴 가쿠타 미쓰요의 것이다. 그래서 현대 소설처럼 쉽게 읽힌다.
2000쪽에 달하는 책 도입부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운 황자에게 히카루(光)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고려에서 온 이름난 관상가라고 한다.’ 천년 세월 애틋한 사랑을 노래한 히카루 겐지가 한반도와 인연이 있다. 혹시 저자도 이웃 나라 관상가를 만났을까? 자기 운명을 물어봤을까? 죽을 때까지 홀로 글을 쓰다가, 세상에 길이 남을 작품 하나 두고 떠날 겁니다. 그런 얘길 들었을까? 이런저런 상상이 더해지면 고전 소설 읽는 밤이 더 즐겁다.
어제 전남 순천의 한 고등학교 북토크에서 학생이 이런 고민을 들려줬다. “저도 고전소설 좋아하지만, 읽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요. 공부도 해야 하고. 어쩌면 좋죠?” 비단 그 학생의 고민만은 아닐 것이다. 책 읽기, 특히 묘사가 섬세한 고전소설은 읽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쇼츠 같은 영상에 빠지면 읽기가 더 힘들다.
“밤마다 조금씩 읽으면 어때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수고스럽게 책을 읽을 이유가 뭐람. 성적이 오르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모르는데. 내 경우엔 밤의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 침대 위에서 천년의 궁궐을 거닐고 싶어서. 그들 마음속으로 들어가 노래하고 싶어서. 이 행위가 내게 일으키는 가장 큰 사건은 ‘나의 확장’이다. 내 영혼의 확장, 내 정신의 확장, 내 마음의 확장. 나를 담는 그릇을 무한하게 키우는 일이다. 부자라도 개미보다 작은 사람이 있다. 가난해도 태산보다 큰 사람이 있다. 독서를 통한 상상력이 우릴 키운다고 믿는다. 그러니 밤마다 조금씩 고전소설 북클럽, 오늘부터 다 같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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