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보아야 아름답다" … AI는 못 찍는 '정물사진'의 매력
작가 구본창과 현대사진 대표 8인
AI 시대 사진의 본질·가치 보여줘
꽃·과일·그릇·구겨진 종이 가방…
정지된 사물의 '사진적 표정' 포착
AI 기술없이 디지털 광학 기법 활용
수작업 거쳐 색조 구현·질감 극대화
"사진은 적극적으로 경험하는 매체
사물과 함께한 시간·사유 녹아있어"

'이 사진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인공지능(AI)이 정교한 이미지를 무한히 쏟아내는 시대, 사람들은 더 이상 사진을 온전히 믿지 못한다. 사진은 곧 진실을 포착하는 기록이라는 기존의 관념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그렇다면 사진만이 지닌 고유한 가치는 무엇일까. 나아가 예술의 반열에 오른 사진은 어떤 미학적 특성을 띠고 있을까.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사진 기획전 '진동하는 사물들'은 한국 현대 사진을 대표하는 작가 9명의 작품 45점을 통해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한다.
작가 구본창(73)이 기획자로 나서 후배 작가인 구성연(56), 김경태(43), 김수강(56), 박찬우(63), 정정호(45), 정희승(52), 조성연(55), 조선희(55)를 초대하는 형식이다. 이들은 과도한 디지털 후보정이나 AI 이미지 교정·생성 기술을 거부한다. 오로지 작가의 눈과 감각, 카메라의 광학적 기술만으로 사진의 본질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난 20년간 국제갤러리 작가로 활동한 구본창은 "표면적인 아름다움을 좇지 않고 20~30년간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작가들의 전시를 갤러리에 제안해 이루어진 첫 사진전"이라고 설명했다. 참여 작가 모두가 "오래 봐야 아름다운" 정물 사진을 선보인다는 점도 이번 전시의 교집합이다.
◆ AI가 찍을 수 없는 '손맛'
전시의 포문은 사소한 사물에도 풍부한 서사를 부여하는 구본창이 연다. '백자'와 '금관'을 렌즈로 담아내며 "사물이 스스로 고해성사를 하게 만든다"는 찬사를 받는 작가다. '오브제' 연작은 와인이나 수저, 시계 상자를 풀었을 때 마주하는 새틴 천 안감이 주인공이다. 작가는 소중한 내용물을 꺼내고 나면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새틴 천과 빈 상자에 주목한다. 주연이 사라진 자리에 홀로 남은 조연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소외된 것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한다.
'컬렉션' 연작에서도 독특한 시선이 돋보인다. 빨간 잔을 촬영한 '컬렉션 18'은 그가 카페에서 우연히 관찰한 결과물이다. 점원이 빨간 색연필로 주문을 받은 뒤 그것을 연필꽂이 잔에 던져 꽂아둔 흔적이 강렬하다. 수천 번, 수만 번 반복된 그 단순한 행위의 궤적은 고스란히 컵의 내벽에 붉은 흔적으로 쌓였다. 작가는 "처절한 어떤 상처 같아 너무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구본창의 작품 옆에는 정희승 작가의 새 연작 '병렬투영'이 걸려 있다. 그에게 사진이란 우연과 필연 사이를 진동하는 망설임이다. 그는 "사진도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같다. 우연에 기대는 작업과 불확정성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조성연 작가 역시 우연성을 강조한다. '우연한 때에 예기치 않았던' '사라지지 않고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 연작의 제목처럼 그는 도시에서 채집한 콘크리트 조각, 철근, 전선, 식물의 잔해 등을 재조합해 새로운 연결과 긴장감을 표현한다.

AI 기술을 거부하지만, 이들은 아날로그 작업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디지털 광학 기법도 적극 활용한다. 김수강은 검프린트 기법을 사용해 회화적인 질감을 구현한다. 종이에 물감을 넣은 용액을 바르고 빛을 쬐고 물속에서 현상하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 색조를 구현하는 복잡한 수작업이다.

김경태는 손톱 크기의 8㎜ 황금 너트를 수만 배 확대해 프린트한다. 카메라를 점진적으로 피사체에 접근시키며 수백 장의 사진을 찍고 각각의 초점이 맞는 부분들을 합성하는 '포커스 스태킹' 과정을 거쳐 사물의 세부적인 형태와 질감을 극대화한다.
◆ 정물 사진의 매력
정물화 또는 정물 사진은 영어로 '스틸 라이프(still life)'라고 한다. 정지된 존재, 꽃, 과일, 그릇, 혹은 책상 위의 작은 소품들처럼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물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가장 오래된 미술 장르 중 하나다. 지난 30년간 이정재와 정우성 등 유명 배우들의 사진을 많이 찍은 조선희는 "인물을 찍듯 사물을 1대1로 바라본다"며 "나의 오브제도 나와 같은 주체"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읜 그는 'Black Imago' 연작을 통해 시들어 가는 꽃의 외피에 재를 연상시키는 검은 안료를 입혀 촬영했다. 'Planet' 연작은 대형 한지를 인화지로 해 프린트한 뒤 화학약품을 쏟거나 불로 태우고, 구겨서 주름을 만들었다.
오직 정물 사진만 고집하는 김수강은 "멋있는 풍경을 찍어 작품으로 걸면 오히려 실제보다 작아 보이는데, 정물은 사소한 것을 찍어 작품으로 걸 때 더 커 보인다. 그것이 매력이자 묘미"라고 밝혔다. 그는 집구석에 처박힌 종이 가방들을 바라보다 그 주름진 구도와 거리, 크기, 높이 등 '사진적 표정'을 눈으로 포착할 때 작업을 결심한다고 밝혔다. 길가에 뒹구는 돌멩이와 일상 소품들이 그렇게 작품이 됐다.
정희승은 "사진을 발명한 사람은 화학자다. 사진은 스크린을 통해 보는 수동적인 매체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경험하는 매체"라며 "사물과 함께한 시간과 사유가 사진에 녹아 있다"고 말했다.
구본창은 "작가가 된다는 것은 한두 가지 이미지로 되는 게 아니다. 작가의 눈, 사물을 천천히 바라보고 교감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앞으로는 'AI 사진'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AI가 뚝딱 생성한 이미지는 너무 매끄럽기만 할 뿐, 뻔하고 지루하다는 반응도 나온다. 이번 전시는 오래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인간적인 손맛, 작가가 사물과 함께 보낸 시간과 경험이 빚어내는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전시는 7월 19일까지.
[이향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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