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다' 대신 '견디는 힘'…체홉이 전하는 위로

황대훈 기자 2026. 6. 12.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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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뉴스12]

안톤 체홉의 대표작 '바냐 아저씨'를 원작으로 한 두 편의 공연이 잇따라 연극 무대에 올랐습니다. 

통쾌한 복수나 극적인 반전 대신, 삶을 묵묵히 견뎌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요. 

같은 원작, 전혀 다른 무대로 오늘의 관객들에게 말을 건 무대, 황대훈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죽은 누이의 남편인 교수를 뒷바라지하며 평생 시골 영지를 지켜온 '바냐’

젊은 두 번째 아내와 재혼한 교수는 그런 바냐의 헌신을 나 몰라라 하고, 영지까지 팔아넘기려고 합니다.

"25년이야. 내가 이 영지를 관리하고 농사짓고 풀 베고 시장에 물건 팔아서 당신한테 돈을 보낸 게 25년이라고. 근데 당신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고맙다고 해 본 적이 없어."

배우 이서진과 고아성의 연극 데뷔작으로도 화제가 된 체홉의 고전 '바냐 삼촌’

이서진은 예능에서 선보이던 말투 그대로 냉소적인 캐릭터 바냐를 효과적으로 소화했고, 고아성은 어리지만 단단한 내면을 가진 소냐 역을 맡아 일상을 견디고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위로를 전했습니다.  

"삼촌 우리 살아보자. 앞으로도 길고 긴 낮과 밤들이 계속되겠지. 우리 그 모든 걸 묵묵히 견뎌내 보자."

국립극단은 같은 원작을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영동군의 정미소로 옮겨 심었습니다. 

인물들은 각기 신여성과 모던 보이로 옷을 갈아 입었고, 바냐 삼촌은 애국 계몽의 꿈을 안고 반야사에 출가했다 돌아온 '박이보'가 됐습니다. 

"난 살아도 산 게 아니야. 서병후가 박이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시간들을 다 박살 내버렸다고. 내 인생 파괴자!"

12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배우 조성하는 집안을 위해 신념을 꺾고 망신창이 '아재'가 돼 버린 중년의 내면을 절절히 그려냈고, 처음 국내 무대에 오른 배우 심은경은 차분한 연기로 식민지 조선에서 해방의 희망을 놓지 않았던 이들의 대변자가 됐습니다. 

"그때 환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해요. 그렇게 아파도 우린 도망가지 않았구나. 살아갔구나."

무대 연출도 차이를 보였습니다. 

LG아트센터는 시대를 특정할 수 없는 거대한 세트로 외로운 인물들의 내면에 관객들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국립극단은 회전하는 누마루와 쏟아지는 빗줄기로 시대적 분위기를 끌어올린 뒤, 운명처럼 내리꽂히는 쌀더미로 무대의 감정을 폭발시킵니다. 

하지만 두 무대가 향하는 곳은 같았습니다. 

화려한 승리도, 통쾌한 복수도 없지만,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는 말. 

주인공들은 결국 바뀌지 않는 현실 속에 가라앉지만, 내면에는 누구도 부술 수 없는 작은 긍지를 간직합니다. 

인터뷰 : 남명지 교수 / 경성대학교 연극영화학부 연극전공

"빠른 템포와 자극적인 것들에 노출되어 있지만 실제로 또 삶에는 와닿지 않는 면들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체홉의 작품들은 일상을 그리면서 소소하게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일들인데 그런데 이것이 존재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거죠."

2026년 대한민국 관객을 만난 체홉의 고전. 

자극적인 '사이다' 한 잔 대신, 일상을 견뎌내는 힘의 가치를 전했습니다. 

EBS 뉴스 황대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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