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근의 감각지능] 디지털반사신경망(상), 중앙과 판단을 분담하는 말단지능

인간은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해왔다. 그 진화가 남긴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모든 판단을 대뇌에 맡기지 않는 신경구조다. 뜨거운 물체에 손이 닿으면 사람은 대뇌의 명령 없이 먼저 손을 떼고, 그 다음에야 “앗, 뜨거워!” 하고 통증을 인지한다. 이처럼 생존과 직결된 자극은 척수에서 먼저 처리된다. 흔히 말하는 '척수반사'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반사(Reflex)'를 생각 없는 자동반응처럼 여기지만, 반사는 생각이 부족해서 생긴 반응이 아니다. 생각해야 할 일과 먼저 피해야 할 일을 나누기 위해, 오랜 진화 속에서 마련한 판단의 분담 구조다.
인간에게 반사가 생존을 위해 마련된 신경 구조였다면, AI 시대의 현장에도 이와 비슷한 구조는 점점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모든 감각을 중앙 지능으로 보낸 뒤 판단하기에는, 어떤 변화는 너무 짧고 어떤 신호는 너무 현장적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더 큰 뇌만이 아니라, 감각 가까이에 놓인 작은 판단 구조다.
현장에서 반복해서 듣는 질문
여러 제조기업의 디지털전환(DX)과 리트로핏에 대한 논의를 하다 보면 비슷한 질문을 반복해서 만나게 된다. 회의실에서는 AI와 DX의 기대가치를 말한다. 데이터를 모으면 품질이 좋아지고, 예지보전이 가능해지고, 공장이 더 똑똑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런데 현장에 내려가면 질문은 훨씬 구체적이다.
“알람의 판단 기준을 우리가 직접 바꿀 수 있습니까?”, “네트워크가 끊겨도 현장 판단은 유지됩니까?” 같은 질문이다. 결국 현장이 묻는 것은 하나다. 설비 조건이 바뀌고 긴급한 이상 신호가 나타났을 때, 현장이 스스로 대응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판단 기준을 자동화된 체계 안에 계속 반영할 수 있는가. 모든 데이터를 중앙으로 보내 중앙에서만 판단하려는 구조에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다.
이 질문들은 단순한 불편 사항이 아니라, 판단과 지능을 현장 가까이에 두고 싶다는 요구에 가깝다. 기업들이 원하는 것은 처음부터 거대한 AI만이 아니었다. 더 절실한 요구는 자신들의 설비와 공정 조건을 스스로 다룰 수 있는 구조였다.
품질 담당자는 불량 조건을 직접 조정하고 싶어 한다. 설비 담당자는 알람 기준과 조치 순서를 현장 상황에 맞게 바꾸고 싶어 한다. 생산 담당자는 대시보드 항목을 외주 개발 없이 고치고 싶어 한다. 경영진은 데이터가 쌓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조치와 개선으로 이어지기를 원한다.
특히 중소·중견 제조기업에서는 이 요구가 더 현실적이다. 모든 설비를 새것으로 바꿀 수 없고, 모든 공정에 고급 IT 인력을 붙일 수도 없다. 설비는 오래됐고, 신호는 제각각이며, 현장 언어는 공장마다 다르다. 그런데 중앙 서버 중심의 구조는 한 번 만들어 놓으면 바꾸기 어렵다. 작은 기준 하나를 바꾸는 데도 외주와 시간이 필요하다면 현장의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이러한 사례와 경험이 쌓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분명해졌다. 제조 AI의 문제는 모델의 성능만이 아니다. 현장 가까이에서 감지하고, 판단하고, 반응하며, 사람이 그 판단 조건을 계속 다듬을 수 있는 구조가 함께 필요하다. 그 구조가 없다면 AI는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어도 현장의 변화에는 늦게 반응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단순한 자동화가 아니라, 현장의 감각과 1차 판단을 중앙 지능과 나누어 맡는 새로운 산업용 구조, 즉 디지털 척수반사 구조였다.
필자는 이런 구조를 디지털반사신경망, DRN(Digital Reflex Network)이라 부른다. DRN은 '센서(반사)-에너지-네트워크-센서플랫폼-기계'를 각각의 장치나 계층으로 나누어 보지 않고, 감각·판단·반응이 이어지는 하나의 산업 신경계로 재정의한 구조다. 여기서 DRN은 중앙 AI를 대신하는 작은 AI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장 가까이에서 감각을 정리하고, 먼저 판단하고, 필요한 반응을 준비해 중앙 지능과 역할을 나누는 구조를 의미한다.

중앙 지능과 말단 지능의 다른 역할
중앙 AI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중앙 AI는 더 큰 흐름을 봐야 한다. 여러 설비의 데이터를 모아 공정 조건을 비교하고, 불량의 원인을 찾고, 유지보수 시점과 생산 조건을 다시 설계하는 일은 중앙 지능이 잘할 수 있는 영역이다. 문제는 그 지능이 현장의 첫 반응까지 모두 대신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현장의 신호는 대부분 정상이다. 설비가 보내는 수많은 데이터 중 실제로 문제가 되는 신호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정상신호까지 모두 중앙으로 보내 판단하게 만든다면, 중앙 지능은 정작 깊이 봐야 할 변화보다 '정상임을 확인하는 일'에 많은 자원을 쓰게 된다. 말단 지능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모든 판단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의 흐름을 현장 가까이에서 구분하고, 중앙이 깊이 봐야 할 신호만 의미 있게 정리해주는 일이다.
현장에는 먼저 알아차려야 하는 신호가 있다. 설비의 소리가 평소와 달라지고, 진동의 결이 바뀌고, 전류와 온도의 흐름이 동시에 어긋나는 순간이 그렇다. 이런 변화는 나중에 중앙에서 분석하면 원인을 더 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 현장에서는 이미 경고를 띄울지, 속도를 낮출지, 작업자에게 확인을 요청할지 판단해야 한다. 중앙 지능이 원인을 해석하는 동안에도 말단 지능은 먼저 움직여야 한다.
자동차로 비유하면 더 쉽다. 내비게이션은 전체 경로와 교통 흐름을 보고 길을 안내한다. 하지만 앞차가 급정거했을 때 브레이크를 밟는 판단까지 내비게이션이 대신하지는 않는다. 그 순간에는 차량 가까이에 있는 센서와 제어장치가 먼저 반응해야 한다. 제조 현장도 마찬가지다. 중앙 AI는 전체를 보고, 말단 지능은 가까운 곳에서 먼저 감지하고 반응한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을 맡는 것이다.
그래서 DRN은 중앙 지능이 더 깊게 판단할 수 있도록, 말단에서 감각을 정리하고 1차 반응을 맡아주기 위해 필요한 구조다. 현장은 대기하지 않고, 중앙은 더 넓게 본다. 이 역할 분담이 있어야 AI는 공장 밖의 거대한 두뇌가 아니라, 현장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중추신경이 된다. 마치 오랜 진화의 끝에 인간의 대뇌 판단과 척수 반사의 역할 분담이 구분된 것처럼.
디지털반사신경망, 말단에서 먼저 판단하는 감각지능
본 칼럼의 1회부터 6회까지 이야기한 내용은 따로 떨어진 기술들이 아니었다. 무전원·무선 센서는 설비가 감각을 가질 수 있게 한 기술이었다. 에너지 하베스팅은 그 감각이 오래 살아남게 하는 조건이었고, 센서플랫폼은 흩어진 감각을 하나로 잇는 말초신경계와 같은 구조였다. 디지털리트로핏은 오래된 설비에 그 말초신경을 심어,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감각을 가진 설비로 바꾸는 일이었다. 이제 남은 질문은 “그 감각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판단하고 반응할 것인가?”이다.
산업 AI는 더 큰 중앙 지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중앙 AI는 넓은 데이터를 보고, 긴 흐름을 분석하며, 더 깊은 원인과 전략을 찾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현장의 모든 감각이 중앙의 판단을 기다릴 수는 없다. 어떤 변화는 짧고, 어떤 신호는 너무 현장적이며, 어떤 반응은 늦게 이해하는 것보다 먼저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디지털반사신경망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필요해진다. 말단에서 먼저 감지하고, 현장 가까이에서 1차 판단을 수행하며, 필요한 반응을 준비한 뒤, 더 깊은 판단은 중앙 지능과 나누는 구조다. 이것은 중앙 AI를 대신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앙이 더 잘 판단할 수 있도록, 말단이 먼저 감각을 정리하고 현장의 의미를 붙잡아주는 일이다.
이 구조가 쌓이면 '감각지능'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DRN(Digital Reflex Network)으로 구현되는 감각지능은 센서를 많이 붙이는 기술도, 작은 AI 모델 하나를 장치에 올리는 방식도 아니다. 감각이 발생한 자리에서 먼저 의미를 만들고, 사람의 경험과 현장의 조건을 반응 기준으로 바꾸며, 중앙 지능과 역할을 나누는 말단 판단 구조에 가깝다. 산업 현장이 스스로 느끼고, 먼저 판단하며, 필요한 순간에 반응해야 하는 시대가 오면서, 감각지능 기반의 산업용 네트워크 체계는 점점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산업 현장의 AI는 더 큰 뇌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중앙 지능이 생각하는 동안에도, 현장은 이미 움직여야 할 때가 많다. 이제는 그 기다림을 줄이고, 감각이 발생한 자리에서 먼저 판단하고 반응을 준비하게 하는 구조가 필요한 때다. 생각하는 AI를 넘어, 필요한 순간 먼저 반사하고 반응할 수 있는 산업 지능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재근 | 코아칩스 대표이사
국내 최초 SAW 기반 무전원·무선 센서 개발자로, 센서·에너지 하베스팅·산업용 무선 계측 분야를 25년 이상 연구해왔다. '표면탄성파(SAW)를 이용한 에너지 포집형 무전원·무선 센서' 연구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SAW 무전원·무선 온도 센서 및 극한 환경용 에너지 하베스팅 무선 센서 등을 개발·제품화했다. 기아자동차 연구원, 호서대학교 교수를 거쳐 2007년부터 코아칩스를 이끌고 있다. 최근에는 무전원·무선 센서, 에너지 하베스팅 무선 센서 및 IIoT 센서를 기반으로 디지털 리트로핏, 온디바이스 AI를 연결한 제조 DX의 현실적 적용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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