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나라를 지킨 사람을, 이제 나라가 지킬 차례다

창백한 푸른 점, 지구촌 동쪽 분단의 땅 한반도에도 유월이 깊어 간다. 이 땅에서 유월은 호국의 달이다. 현충일의 사이렌도, 헌화의 행렬도 지나가고, 들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푸르다. 그러나 기념식이 끝났다고 호국의 달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 평온한 하루가 누군가의 희생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유월의 푸른 바람은 한 달 내내 우리 가슴을 가만히 두드리며 일깨운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산화한 병사들, 가족을 뒤로하고 전선으로 향했던 청년들. 그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바로 이런 보통의 하루였을 것이다. 그래서 유월이 깊어 갈수록 마음 한구석에 오래된 물음 하나가 떠오른다. 나라를 지킨 사람들을, 우리는 잘 지켜 주고 있는가.
나라를 지키는 일은 전장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총성이 멎은 시대에도 호국은 계속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보를 분석하고, 한밤중에 위기 상황을 보고받으며, 불완전한 정보와 촉박한 시간 속에서 국가의 명운이 걸린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안보의 일선에 선 공직자들이다. 그들의 판단 하나하나가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그들 역시 이 시대의 호국자들이다. 군인이 총칼로 나라를 지킨다면, 그들은 정보 분석과 판단으로 나라를 지킨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판단으로 나라를 지킨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의 재판이 그 물음을 던진다. 지난해 12월 1심 재판부는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사건 관련 논의와 지시, 조치와 보고가 모두 정식 체계와 절차를 밟아 이루어졌고 대부분 문서로 기록되어 남아 있으며, 제한된 시간과 한정된 정보 속에서 내려진 당국의 판단에 합리성이 결여되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검찰도 피고인 다수에 대한 항소를 하지 않아 무죄가 확정되었다. 그럼에도 재판은 4년째 이어졌고, 평생을 국가안보에 헌신해 온 공직자들이 인생의 황혼을 피의자와 피고인의 신분으로 보내야 했다. 이제 그 항소심 선고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이 재판이 남긴 그늘은 법정 안에 머물지 않는다. 지금 안보 현장에서는 상부의 지시를 일일이 수첩에 기록해 두며 혹시 있을지 모를 미래의 사법조치에 대비하고, 이제 안보 사안도 검찰에 물어보고 결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자조 섞인 이야기마저 오간다고 한다. 개인의 비리도 아니고 법을 위반한 것도 아닌데, 업무상의 판단과 보고와 협의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오랜 수사와 재판을 감당해야 한다면, 위기의 순간에 누가 결단하려 하겠는가. 책임을 위로, 옆으로, 아래로 미루어야 살아남는다는 학습이 안보기관에 뿌리내린다면, 그 대가는 결국 국민의 생명으로 치르게 된다.
국가안보의 결정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정보와 촉박한 시간, 상충하는 국익 사이에서 내려지는 고도의 전문적 판단이다. 그 판단이 시간이 흘러 정치적 환경이 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형사 법정에 세워질 수 있다면, 어떤 공직자도 소신껏 직무에 임할 수 없다. 9·11 테러나 이라크전 정보 판단처럼 격렬한 논란을 겪은 사건에서도 미국과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정책 판단을 형사 처벌로 직결시키지 않은 것은, 그것이 국가의 위기 대응 역량을 지키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논의의 바탕에는 한 분의 안타까운 희생이 있다.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아픔은 그 무엇으로도 다 위로할 수 없다. 국가는 이 비극 앞에서 겸허해야 하고, 유가족의 슬픔을 끝까지 어루만져야 한다. 그러나 유가족의 슬픔을 위로하는 일과,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직무를 수행한 공직자에게 형사 책임을 묻는 일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진정한 위로는 진실에 기초한 공정한 평가와,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의 개선에서 온다. 그리고 그 제도의 개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다.
호국보훈의 정신은 의례적인 기념식장의 헌화로 완성되지 않는다. 전사한 군인을 현충원에 모시는 일과, 지금 이 순간에도 나라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위축되지 않고 직무에 헌신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일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정책 판단과 형사 책임의 경계를 명확히 세우고, 위기 상황에서 공직자들이 주저함 없이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과 국민적 합의를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분단 시대의 진정한 보훈으로 우리 마음에 와 닿을 것이다. 이것은 국가안보의 일선에 섰던 공직자들을 두둔하거나 진영을 가르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갈라진 마음들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라는 공동의 가치 앞에서 다시 하나가 되자는 간절한 호소다. 나라를 지킨 사람을 국가와 국민이 함께 지켜줄 때, 비로소 공직자들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 온전히 자신을 던질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사법부의 독립과 권위를 깊이 존중하며, 항소심 재판부 역시 1심과 마찬가지로 방대한 기록을 살펴 사실과 절차에 기초한 정의롭고 지혜로운 판단을 내려 주시리라 믿는다. 이번 선고가 4년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우리 사회가 갈등과 반목을 넘어 화합의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분기점이 되기를 농촌의 작은 교회를 섬기는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오늘도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한 목회자만의 기도이겠는가. 평온한 일상이 지켜지기를 바라는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의 일치된 염원이요, 중동의 포성이 하루빨리 멎기를 기다리는 지구촌 모든 인류의 간절한 소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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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선 산천무지개교회 담임목사 nocutnews@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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