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은 무명씨들의 항쟁”…광주공원 ‘김군비’가 말하는 것

한겨레 2026. 6. 12. 07:06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월길 이야기⑥ 광장 코스: 광주공원 광장
광주공원 계단 초입에 있는 ‘김군비’.
오월길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흔적을 따라 걷는 66.2㎞의 길이다. 횃불, 희생, 광장, 열정, 영혼, 그리고 최근 추가된 ‘한강 작가 소년의 길’까지 6개 코스다. 길을 따라 주요 현장에 사적비를 세워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광주광역시가 만든 스마트투어 앱 ‘5·18 민주화운동’을 따라 걸으면 편리하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도 오월길 안내 코너가 따로 있다. 광주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 광주를 겪은 백기철 전 한겨레 기자가 오월길 이야기를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오월길 광장 코스의 시작점인 광주공원은 5·18민중항쟁 당시 시민군 집결지였다.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 자위권 차원에서 무장한 시민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이곳에 모였다. 5월24일 도청으로 시민군이 통합될 때까지 시내 순찰, 차량 등록 등 치안 관련 업무가 이뤄졌다. 총탄을 앞세운 계엄군에 맞서기 위해 시민들은 인근 시군에서 예비군용 총과 탄약 등 무기를 가져와 이곳에서 시민군을 편성하고 사격훈련을 했다.

예전에는 제법 크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담한 공원이다. 광주천변에서 이어지는 공원 앞 광장은 탁 트인 느낌이 난다. 중앙 계단을 따라 오르면 시민회관이 보이고, 좀 더 오르면 현충탑이 자리하고 있다. 광장 여기저기에 이런저런 건물과 비석들이 올망졸망 세워져 있다. 5·18 당시 시민군들이 사격훈련을 했다는데 그럴만한 공간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시민회관 앞 광장에 주차장이 들어선 탓인 듯하다.

공원 초입 계단에는 ‘김군비’가 있다. 계단 왼쪽에 비스듬히 서서 왼손을 내밀어 무언가 설명하는 듯한 포즈다. 무장 시민군 복장이다. 전투경찰이 버리고 간 방석모를 쓰고 있다. 김군이 오른손으로 짚고 있는 받침돌 명판에는 “5·18 시민군 김군은 1980년 5월24일 광주 남구 송암·진월동에서 계엄군에게 사살되었고 그의 시신은 어디론가 유기되었다”고 적혀 있다. 또 “40주기를 맞아 5·18 시민군을 최초로 결성했던 광주시민공원에 이름 없이 사라져간 시민군들을 기리며 비를 세운다”고 적었다. 항쟁 40돌이던 2020년 세운 추모 조각물이다.

광주공원 김군비는 2018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감독 강상우)이 계기가 됐다. 영화 ‘김군’은 5·18 당시 찍힌 사진 속 시민군 한 사람을 찾아 나선다. 항쟁 당시 사진기자 7명이 각각 찍은 사진 47장에 이 인물이 등장한다. 5·18 당시 가장 유명한 무명인이었던 셈이다. 경찰 페퍼포그차 상단에 서서 거치된 기관총을 옆에 두고 비스듬히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 머리에 쓴 방석모에는 ‘석방하라 김군’이란 글씨가 쓰인 흰 천을 두르고 있다. 목장갑으로 보이는 장갑을 끼고 있다. 기관총은 타이어에 받쳐 거치했고, 총알 탄띠가 걸쳐져 있다.

2015년 5월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전시회에서 사진을 보고 이 사람 성이 김씨라고 알아본 이가 등장했다. 그는 이 인물이 ‘김군’으로 불린 넝마주이 청년이었고, 부모님이 운영하던 막걸리 가게에 매일 같이 들르던 넝마주이 무리 중 한 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때마침 5·18 북한군 투입설을 주장해오던 지만원은 같은 해 6월 기자회견에서 이 사진 속 인물을 북한군 특수군 ‘광수 1호’로 지목한다. 이 사진과 2010년 5월 평양의 사진 속 인물의 음영, 등고선 등을 분석한 결과 100% 동일인으로 결론지었다는 것이다. 지만원은 더 나아가 이런 ‘기하학적 분석’을 통해 모두 300여명에 달하는 광주의 북한 특수군 ‘광수’들을 발견했다고 했다.

영화 ‘김군’의 감독 강상우는 책 ‘김군을 찾아서’에서 “그와 행적이 교차한 생존자들을 만나다 보면 ‘오답’이 분명한 지만원씨의 ‘광수’ 세계관은 물론이려니와,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주입돼 온 ‘민주화운동’ 서사와는 또 다른, 현재의 공기에서 살아 숨 쉬는 기억과 관계들의 망을 포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썼다. 영화는 이렇게 9개월 동안 생존자 100여명을 만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김군을 찾지 못한다. 김군 추적은 최진수 인터뷰에서 끝이 난다. 1980년 5월24일 광주 외곽 송암동에서 발생한 계엄군 간 오인 교전 뒤 군인들은 민가에 숨어 있던 김군을 끌어내 총살했고, 시민군 동료였던 최씨가 바로 뒤에서 이를 지켜봤다는 것이다. 김군 시신은 군인들이 어디론가 가져간 뒤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다. 이후 김군은 ‘무연고 행방불명자’를 의미하는 대명사가 됐다. 최진수 등의 주도로 2020년 5월 광주공원 김군비가 세워졌다.

김군을 둘러싼 논란은 2022년 5월 5·18조사위가 김군의 실제 인물이 차복환이라고 공개하면서 새 국면을 맞았다. 조사위는 7개월에 걸쳐 다각도로 검증한 결과 차씨가 사진 속 인물과 같다고 결론 내렸다. 차씨는 기자회견에 직접 나와 “광주에서 공장을 다니던 1980년 우연한 계기로 시민군에 합류했다가 직업군인인 형의 만류로 집에 돌아온 뒤 가족이 받을 불이익을 우려해 시민군 가담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고 했다. 차씨는 자신이 ‘김군’이란 사실은 2021년 5월 아내가 우연히 영화 ‘김군’을 본 뒤 말해줘서 알게 됐다고 했다. 5·18조사위는 또 애초 김군으로 알려진 이는 ‘자개공 김종철’이라고 발표했다. 김씨는 효덕초등학교 앞 삼거리에서 계엄군에 붙잡혀 사살된 뒤 야산에 가매장된 후 광주시청 관계자들에 의해 시신이 수습됐다고 했다. 하지만 이 발표 이후에도 최진수 등은 자신이 목격한 ‘김군’ 사망 경위와 조사위가 발표한 김종철 사망 경위가 다르다며 여전히 다른 ‘김군’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차복환씨가 기자회견에서 “영화 ‘김군’의 실제 주인공은 나”라고 증언하고 있다. 5·18조사위 제공

어쨌든 5·18조사위 발표로 보면, 차복환은 42년 동안 흔적 없이 사라졌던 ‘무명의 시민군’이었던 셈이다. 차씨는 5·18 이후 광주를 떠나 살았다고 했다. 항쟁에 끝까지 참여하지 못한 사실이 그를 괴롭혔고, 언론에서 5·18 이야기가 나오면 애써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지만원은 그사이 숱한 북한군 개입설을 퍼뜨리다 유죄 판결을 받고 실형을 살았다. 2020년 2월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2023년 1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꼬박 2년 징역을 살다가 2025년 1월 만기출소했다. 2024년 지만원은 ‘광수’로 지목한 차복환 등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패소했다. 지금 살펴보면 지만원은 조금은 부족한, 엉터리 극우다. 5·18이 김일성 교시로 이뤄졌다는 주장부터 당시 합참이 전남 해안을 비워서 북한군 600명이 침투할 수 있었다는 것까지 온갖 해괴한 논리를 들이댔다. 이런 황당한 주장들은 검찰과 법원, 관련 단체와 기관들의 검증으로 거짓으로 판명됐다.

반면 최근 스타벅스 ‘5·18 탱크 데이’ 이벤트로 드러난 이른바 ‘신극우’ 행태는 신진욱 중앙대 교수가 지적한 대로 밈·유머·패러디 등으로 깃털처럼 가볍다. 지만원과 같은 ‘구극우’는 극단적 언어와 주장, 폭력을 드러내는 반면 ‘신극우’는 극단/정상, 불법/합법의 경계에서 가치와 문화, 세계관을 서서히 잠식한다. ‘5·18 탱크 데이’ 이벤트는 스타벅스라는 글로벌 브랜드를 업고 ‘5·18은 폭동’이라는 밈을 맘껏 발산한 것이다. 5·18에 대한 새로운 도전인 셈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개정판은 항쟁 당시 광주공원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5월21일 낮 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집단 발포하자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 외곽으로 나가 경찰서 무기고 등에서 총을 탈취해 돌아왔다. 화순, 나주, 담양 등에서 유입된 무기는 시위대가 유동 삼거리, 충금 지하상가, 광주공원 부근에서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너도나도 나서는 분위기여서 총기는 잠깐 사이에 모두 없어졌다. 총기 교육을 한 뒤 사람들을 광주공원으로 모이게 했다. 광주공원이 도청 인근에서 가장 넓고 차량도 많이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주공원에서는 3백명 이상의 청년들이 사격 연습을 했다. 예비군훈련 때와 마찬가지로 총에 실탄을 넣은 다음 다섯발씩 표지판을 향해 쐈다. 사격 교육이나 부대 지휘는 예비역 장교나 예비군 가운데 하사관 출신 등이 맡았다. 옷이나 모자는 계엄군과 경찰, 전경이 도청에서 퇴각할 때 버리고 간 군복, 방석모를 걸쳤고 고등학생들은 교련복을 주로 입었다. 그들은 대다수가 식당 종업원, 자개가구 노동자, 공장 노동자, 자취하던 대학생, 재수생 등이었다. 화순, 나주, 담양, 영암, 해남, 함평 등 광주 인근에서 21일 시위 차량에 탑승해 참여하게 된 청년들도 적지 않았다. 고등학생들도 꽤 눈에 띄었다. 대부분 소외된 기층 민중들이었고 소수의 학생들이 섞여 있었다. 기층 민중들이 이렇게 발 빠르고 용감무쌍하게 움직인 것과 달리 당시 광주에 있던 운동권 인사들은 우유부단했다. 녹두서점에 있던 운동권 인사들은 5월21일 계엄군이 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하자 서점에서 나와 보성기업으로 옮겨 대책을 논의했다. 오후 3시쯤 “상무대 앞에 있던 20여대 군용트럭이 화정동에서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전화가 왔다. 대낮에 시민들에게 발포한 데 이어 군인들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다고 생각한 이들은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각자 피신하되 죽지 않고 살아서 만납시다”는 등의 말을 나누고 뿔뿔이 흩어졌다. 김상집은 ‘녹두서점의 오월’에서 집단 발포 후 군용트럭이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에 운동권이 겁을 먹고 도망치기로 작정하고 있는 동안 시민들은 어느새 지원동 탄약고와 화순탄광의 다이너마이트를 털고 화순경찰서와 예비군의 무기고에서 나온 물품들을 실어 단단히 무장하고 나타났다고 썼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개정판은 이때 예외적 인물이 윤상원과 김영철이었다고 적고 있다. 윤상원은 처음부터 항쟁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시민들과 호흡하며 투쟁의 한가운데 있었다. 김영철 역시 윤상원을 도와 들불야학 학생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제작했다.

광주공원 시민회관 앞 광장. 지금은 주차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스마트투어 앱 ‘5·18민주화운동’ 캡처.

1980년 5월 광주에서 기층 민중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이 왜 총을 들었는가를 누구보다 오랫동안 천착한 이가 얼마 전 작고한 최정운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다. 최정운은 ‘오월의 사회과학’에서 1984년 무렵 새롭게 사회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 민중이라는 말은 외국 이론이 아니라 5·18 해석에서 등장한 독창적 개념이었다고 했다. 광주 시민들 거의 모두를 포괄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5·18의 막바지 투쟁에 끝까지 참여한 기층민 집단을 일컫는 개념이었다.

신군부는 이들 깡패, 넝마주이, 무직자, 노동자, 구두닦이 등 룸펜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폭도로 지목하면서 5·18 전체의 성격을 규정하려 했다. 하지만 이들이 항쟁 당시 투쟁에 앞장서면서도 시민정신에 충실했다는 것만으로도 신군부 논리는 반박된다. 학생,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구타당하고 어린이들까지 학살당하는 극도의 비상 상황에서 도시 빈민들이 가두 투쟁에 앞장서고 조직 폭력배들도 시민들의 자치 활동에 협조를 선언한 것은 다름 아닌 시민정신의 발로였다. 최정운은 광주 시민들의 투쟁 동기가 민주주의라는 제도나 이념이 아니라 인륜과 공동체의 가치였다고 했다. 또 1980년대 민주화투쟁은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힘이라기보다 5·18의 처절한 경험, 그리고 각종 고문사건 등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가 깨지는 것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됐다고 썼다.

광주공원 김군비는 오월항쟁에 참여했다 흔적 없이 사라진 무명의 시민군, 무명의 시민들 이야기다. 또 항쟁의 중심에 섰던 기층 민중들의 이야기다. 항쟁 이후 계엄군에 붙잡혀 상무대 영창 등에 구금된 이들은 대략 3500명 선으로 추산된다.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이 중 5·18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은 이들이 최대 900명에 달한다. 불법 구금됐던 이들 중 25%가량이 어떤 이유에서든 ‘이름 없는 항쟁 주역’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또 계엄군에게 붙잡히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저렇게 항쟁에 참여했던 이들은 부지기수다. 당시 항쟁을 겪었던 이들과 얘기하다 보면 곧 알게 된다. 항쟁에 참여해서 이름을 남긴 이들보다 이름을 남기지 않은 이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어쩌면 5·18은 이런 무명씨들의 항쟁이었는지도 모른다.

글·사진 백기철 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객원교수 kckc100@naver.com

(참고자료)

영화 ‘김군’(감독 강상우, 2018)

강상우, ‘김군을 찾아서’(후마니타스, 2020)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창비, 2017)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오월의 봄, 2012)

김상윤 정현애 김상집, ‘녹두서점의 오월’(한겨레출판, 2019)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2024)

신진욱, “‘5·18 탱크 데이’, 그 한없이 가볍고 무서운 폭력”(한겨레, 2026.5.27.)

광주광역시 스마트투어 앱 ‘5·18민주화운동’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s://518.org/base/main/view

글쓴이 백기철은 광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 때 고교 2년생으로 광주를 겪었습니다. 2023년까지 서울에서 ‘한겨레’ 기자로 33년간 일했습니다. 최근 2년여 동안 매주 광주를 찾을 일이 생겨 틈틈이 오월길을 걸었습니다. 그 사이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따라 걷는 오월길은 더욱 애잔하면서도 명징했습니다. 오월길에서 접한 광주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담아 독자들과 만나려 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