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 끝나자 왕진 가방 든 간호사… "젊은 의사 사라져 투잡 뛸 판"

박지윤 2026. 6. 12.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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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풀뿌리 의료]
①의사가 사라진 마을<상편>
경기 광주 남한산성 무의촌 1인 진료소
간호사 보건진료소장의 하루 동행 르포
지난달 18일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면 산성리 산성리보건진료소에서 보건진료직 공무원(간호사) 나영란 보건진료소장이 환자를 진찰하고 있다. 윤기훈 인턴기자

"아이고 어머님, 이것 보세요. 공복 혈당이 130이 나오셨네요? 어머님은 당뇨 환자라 혈당이 126 넘어가면 신경 쓰셔야 하는데 요새 맛있는 거 드시나 보다. 뭘까요?"

지난달 18일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 중턱에 위치한 산촌 마을 산성리. 반경 10㎞ 내에 의원, 약국 하나 없는 이 마을 주민들이 기댈 곳은 산성리보건진료소 하나뿐이다. 오전 8시 열자마자 92세 김점례(가명)씨가 찾아왔다. 매달 당뇨 치료제를 처방받는 김씨에겐 차량으로 왕복 1시간 걸리는 시내 병원보다 이 진료소가 더 믿음직하다.

나영란(57) 보건진료소장이 혈당 수치를 확인하자마자 김씨의 한 달 식단을 추적했다. 그는 오랜 기간 의료 취약지에서 일하면서 어르신 진료 경험을 쌓아온 베테랑이다. 김씨가 며칠 전 자녀가 사 온 땅콩 과자 얘기를 꺼내자, 나 소장은 "과자 어쩌다 한 번 드신 것 가지고 수치가 이렇게까지 안 오른다"며 다시 물었다.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김씨는 "맞다. 요즘 들어 부쩍 입이 자꾸 바싹바싹 말라. 그럴 때마다 사탕을 물고 있었어"라고 털어놨다. 고개를 끄덕인 나 소장은 "입 마르시면 차라리 물을 더 자주 드셔. 우리 어머니 건강하게 사시려면 약보다도 평소에 뭘 드시는지가 더 중요해요"라며 20분간의 진료를 마쳤다.


"소장님 없었으면 큰일 났을 거야"

나영란 진료소장은 과거 국립중앙의료원, 국립재활원 등에서 일하며 다양한 임상 경력을 쌓았던 베테랑 간호사다. 현직 간호사 업무에서 물러난 2008년부터는 보건소와 보건지소를 거쳐 1인 체제로 운영되는 보건진료소에서 일하고 있다. 윤기훈 인턴기자

간호사 출신 보건진료직 공무원인 나 소장은 산성리를 포함해 약 1,000명이 사는 남한산성면을 지키는 거의 유일한 의료인이다. 그의 직장인 보건진료소는 보건지소, 보건소와 함께 지역보건의료기관의 중심축이다. 지역 보건의료 컨트롤타워인 보건소는 전국 246개(시·군·구별 1개), 전진기지인 보건지소와 보건진료소는 각각 1,326개, 1,894개로 읍·면과 동·리 단위를 촘촘히 맡는다.

보건지소와 보건진료소의 차이점

보건소와 보건지소는 공중보건의사(공보의·병역 대신 보건의료 취약지역에서 일하는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가 파견된다. 반면 더 작은 구역을 담당하는 보건진료소는 전체의 95%가 나 소장처럼 보건진료직 공무원 1인 체제로 돌아간다. 보건진료직 공무원은 경증 외상 치료, 응급 처치, 예방접종, 만성질환 관리 등 의사 진료 행위 중 일부를 예외적으로 맡고, 91종의 약을 직접 처방한다.

벌에 쏘이거나 독초를 잘못 먹고 쇼크를 일으키는 등 응급 상황이 터지면 119보다 나 소장을 먼저 찾는다. 마을 토박이 유정숙(73·가명)씨 역시 몇 주 전 한밤중 위경련이 도지자 보건진료소 옆 나 소장 사택의 문부터 두드렸다. "저 같은 경우가 한둘이 아니에요. 우리 동네는 여기 소장님 안 계시면 어우, 생각만 해도 아찔해요. 아마 큰일 날 거야."


왕진 가방 든 간호사, 어르신 댁으로

나영란 진료소장이 이웃마을인 불당리 마을회관을 찾아 노인들에게 생활체조 수업을 하고 있다. 나 소장은 진료, 처방 업무는 물론 방문간호, 응급처치, 운동지도, 돌봄 코디네이팅 역할까지 도맡고 있다. 윤기훈 인턴기자

오후가 되자 나 소장은 왕진 가방에 휴대용 혈압·혈당 측정기를 챙겨 이웃 불당리 마을회관에 방문 진료를 갔다. 산성리보건진료소까지 직접 오기 힘든 어르신들을 만나러 한 달마다 찾는 곳이다. 마을회관에 자주 나오시는 어르신들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근력 강화 스트레칭을 가르쳤다. 또 큰 병원 진료가 필요한 주민의 자녀에겐 전화로 증상을 일일이 설명했다.

마을회관 진료를 마친 후엔 거동이 불편한 80대 부부 집으로 향했다. 골다공증과 노쇠로 지팡이에 의지해야 겨우 집 안을 돌아다닐 수 있는 82세 아내 이순덕(가명)씨가 인지장애를 가진 남편을 돌보는 '노노(老老) 케어' 가구다. 부부 모두 마을회관까지 나오는 것조차 버겁다.

“두 분은 사실 요양원에 가셔야 하는데 아버님이 거부하고 계세요. 비용 걱정도 크고요. 그래서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본인 부담금이 줄어드는 장기요양 인정 신청을 하실 수 있게 연결해 드렸어요." 이처럼 장기요양 등 각종 복지 제도가 낯선 어르신과 자녀들에게 잘 알려주는 것도 나 소장의 몫이다.


공보의 급감에, 불똥 튄 진료소장

나영란 진료소장이 이순덕(가명)씨 자택에 방문해 혈압, 혈당 등 건강 상태와 영양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윤기훈 인턴기자

몸이 여러 개여도 모자랄 만큼 일하지만, 요즘 나 소장의 걱정은 더 깊어졌다. "그나마 내 진료소 하나만 책임질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것이다. 지역 의료를 떠받치는 또 다른 축인 공보의급감하면서 보건진료소장이 인근의 보건지소까지 맡아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올해 의과 공보의 복무 인원은 592명으로 지난해 945명에서 크게 줄었다. 2017년(2,116명)과 비교하면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의정 갈등 속에 의대생이 공보의 복무 대신 군 입대를 택하며 발생한 후폭풍이다. 공보의 복무 기간은 36개월로, 현역병(육군 기준 18개월)보다 길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인력난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경남 합천군 보건소는 공보의를 구하기 어려워 관리 의사를 일당 100만 원에 채용하기도 했다. 공보의 부족이 현실화하자 보건복지부는 지난 3월 대책을 내놨다. 노인 인구가 많고 민간 의료기관이 없는 보건지소 532곳을 '1차 의료 취약지'로 추리고, 이 가운데 139곳에 공보의를 투입하기로 했다. 전체 공보의 592명 가운데 보건소·보건지소 등 지역보건의료기관 몫으로 배정한 459명 중 159명을 배치했다.

공보의를 두지 못한 393곳은 세 갈래로 개편한다. △보건진료직 공무원을 파견하는 '통합형'(151곳) △보건지소를 보건진료소로 바꾸는 '전환형'(42곳) △보건소 소속 공보의가 보건지소를 주 2, 3회 돌아다니는 '순회진료형'(200곳)이다. 결국 공보의의 빈자리를 보건진료소장으로 메우는 셈이다.

나 소장은 통합형 체계가 사실상 보건진료직 공무원들이 '투잡'을 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본다. 통합형 보건지소에 투입될 신규 인력이 26주 교육을 마치고 배치되는 건 10월 말. 그전까지는 인근 보건진료소장들이 업무를 맡을 수밖에 없어서다. 나 소장은 "한 명의 진료소장이 두 군데를 커버하게 되면 원래 나가고 있던 가정 방문, 경로당 방문 등의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며 "양쪽 모두에서 의료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의정 갈등 때 예고, 늑장 대처 비판

보건진료소장들의 어려움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익명을 요청한 제주 서귀포시의 보건진료소장은 "옆 동네 진료소장이 육아휴직으로 자리를 비우면 다른 지역 진료소장들이 자신의 진료소 문을 닫고 출장 가는데 이때만 해도 주민 불만이 있다"며 "결국 지역 주민의 원성을 감당하는 건 진료소장"이라고 말했다.

통합형 보건지소에 보건진료직 공무원이 새로 배정되더라도 의료의 질을 담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보건진료소보다 담당 구역이 큰 보건지소에는 더 다양한 유형의 환자가 모이는 만큼 간호사가 대처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복지부는 보건진료직 공무원이 화상으로 의사에게 도움을 구하는 원격협진을 보완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보건진료직 공무원들도 필요한 정책이라고 동의하나 현장에선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고 본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이 4월 24일 경북 영주시 안정면보건지소를 방문해 의료진과 대화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제공

김영남 보건진료소장회 회장은 "원격협진을 하려면 환자를 대기시키고 의사와 실시간 연결을 해야 하는데 그 시간을 일일이 맞추기 어렵다"며 "공보의 부족 탓에 연결 가능한 의사도 적다"고 말했다. 임은실 대구대 간호학과 교수는 "지금처럼 딱 정해진 시간에만 원격협진을 한다면 고혈압 등 만성질환자만 받고 응급환자는 대응하기 어렵다"며 "보건진료소장이 손가락 혈압기, 휴대용 심전도 측정기 등 방문 진료 때 가져갈 수 있는 의료기기로 환자를 검사한 후 의사가 바로 판단을 도와주는 협진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공보의 공백이 앞으로 수년 동안 이어진다는 점이다. 복지부는 의과 공보의 기준 2031년까지 매년 신규 충원 인원이 100명대에 불과해 전체 복무 인원 역시 300~500명대로 예상한다. 공보의 부족과 이들의 빈자리를 메우는 보건직료직 공무원의 업무 과부하가 맞물리면 결국 피해는 의료 취약지 환자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공보의 급감이 의정 갈등 당시 이미 예고된 일인데 정부가 수년 동안 손을 놓고 있다가 늑장 대응을 한다는 비판도 있다. 김새롬 인제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의정 갈등 이전에도 공보의는 이미 줄고 있던 상황을 감안하면 대응이 너무 늦었다"라며 "공보의 부족을 완화하기 위해선 보건진료소장의 진료 역량을 확대해야 하는데 의사 단체 반대가 심해 정부도 방어적으로 대처한 것 같다"고 말했다.

<대안은 하편에서 계속>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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