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패권주의…미국의 피로, 중국의 조급, 한국의 선택[2026경향포럼 기고]

서용석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 2026. 6. 11.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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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학자 조지 모델스키는 세계정치를 약 100년 주기의 긴 리듬으로 읽었다. 한 세기마다 바다를 장악한 나라가 질서의 중심에 서고, 그 권위는 쇠퇴와 도전을 거쳐 다음 강국에게 넘어간다는 것이다. 16세기 포르투갈, 17세기 네덜란드, 18·19세기 영국, 20세기 미국으로 이어진 해양 패권의 계주가 그 대표적 사례다. 그의 장주기는 세계전쟁·세계대국·탈정당화·탈집중화의 네 국면으로 순환한다. 전쟁은 새 승자를 낳고, 승자는 질서의 규칙을 설계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 권위는 의심받고, 힘은 여러 중심으로 흩어진다.

이 시계로 보면 미국은 세계대국의 정점을 지나 탈정당화와 탈집중화가 겹치는 구간에 들어선 듯하다. 안으로는 민주주의의 균열, 재정 부담, 전쟁 피로, 동맹 관리 비용이 누적되고 있다. 밖으로는 제조업, 해군력, 기술표준, 공급망을 키운 중국의 도전이 미국의 지도력을 흔든다. 그렇다고 다음 패권국이 자동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장주기는 예언이기보다, 위험이 쌓이는 구조를 보여주는 도식에 가깝다.

이 전환을 한국은 관찰자가 아닌 당사자로 마주한다. 안보는 미국에, 교역은 상당 부분 중국에 기대어왔다. 패권국이 피로를 호소하고 도전국이 조급해질수록, 그 사이에 선 중견국의 운신 폭은 좁아진다. 탈집중화란 강대국에는 전선의 분산이지만, 한국 같은 나라에는 불확실성의 증대를 뜻한다.

2026년 봄 미국·이란 전쟁은 이러한 전환기의 한 증상이다. 호르무즈를 둘러싼 군사력 투사는 해상 통로의 지배가 곧 세계 권력이라는 명제를 다시 일깨운다. 그러나 봉쇄와 교전, 휴전과 협상이 반복되는 교착은 패권의 피로를 드러낸다. 한 해협에 함대가 묶이는 동안 미국의 시선은 분산되고, 서태평양에 쏟아야 할 자원이 중동에 다시 흘러간다. 호르무즈는 한국에 먼 바다가 아니다. 원유와 천연가스의 상당량이 이 통로를 지나고, 해협의 긴장은 곧 물가가 되어 한국의 식탁과 공장에 닿는다.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항행 안전과 비용 분담을 요구받을 가능성도 커진다.

더 결정적 무대는 대만해협이다. 두 강대국의 힘이 비등해지고 어느 쪽도 물러서기 어려운 상징적 공간이 등장할 때 질서는 가장 위험하다. 대만은 첨단 반도체가 집중된 섬이자, 중국이 핵심 이익으로 규정한 영토이며, 미국이 무기 판매와 안보 협력으로 억지력을 떠받치는 최전선이다. 한국과 대만은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양대 축이다. 그곳의 충돌은 글로벌 분업 전체의 마비로 번질 수 있다. 또 대만 유사시 주한미군과 한반도 기지가 작전에 호출되고, 북한이 그 틈을 노린다면 대만의 위기는 손쉽게 한반도의 위기로 전이된다.

미·중은 외교 채널로 관계를 관리하려 하지만, 대만을 둘러싼 군사적 경쟁은 멈추지 않고 있다. 한쪽은 현상 유지를 말하고 다른 한쪽은 통일을 말한다. 그러나 군사적 준비의 언어는 점점 닮아간다. 모델스키의 표현을 빌리면, 두 강대국은 세계전쟁 직전의 긴장을 차곡차곡 축적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역사는 기계처럼 반복되지 않는다. 핵억지, 경제적 상호의존, 국제제도, 인간의 선택은 과거와 다른 길을 열 수 있다. 관건은 다음 패권국의 이름이 아니다. 강대국들이 자신의 불안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있다. 쇠퇴를 받아들이지 못한 패권국과 인내를 잃은 도전국이 같은 해협에 함대를 밀어 넣는 순간, 위기는 우발적 충돌을 넘어 세계 질서 재편의 방아쇠가 될 수 있다.

한국의 과제는 강대국들이 불안을 키워가는 이 시대를 중견국으로서 어떻게 통과하느냐다. 동맹을 관리하되 한쪽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 균형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기다. 북한을 억지하면서도 우발적 충돌의 사다리를 끊을 안전판도 마련해야 한다. 호르무즈는 경고를 먼저 보여준 무대였고, 대만은 그 경고가 더 큰 규모로 되풀이될 장소다. 시계의 바늘을 멈출 수는 없더라도, 그 진동에 휩쓸리지 않을 균형만은 우리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서용석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

서용석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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