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증과 예술의 경계…캔버스에 쏟아낸 핏빛 환각 <이근민 개인전>
경계에 대한 물음 던지는 이근민 작가 개인전
‘장면이 되기 전(Before It Becomes a Scene)’

피와 장기, 살점… 문자로만 접해도 섬뜩한 신체 일부들이 잔뜩 뒤엉켜 형상을 만들어낸다. 서울 삼청동 PKM 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이근민 작가 개인전 ‘장면이 되기 전(Before It Becomes a Scene)’에 걸린 작품들의 모습이다. 갤러리의 새하얀 벽 위로 시퍼런 멍과 새빨간 핏빛 회화가 관객들을 맞이한다.
서울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이근민은 자신이 경험한 환각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다. 이번 전시에서 3미터 높이의 대형 회화를 포함한 페인팅 작업과 드로잉 연작 등 23점의 신작을 국내 최초로 공개한다.

이근민 작가의 작품에는 근육과 내장, 혈흔을 연상케 하는 형상들이 가득하다. 작가는 이 형상들은 규정되지 않은 무언가를 이루었던 일부일 수도, 온전한 모습이 되기 전 출산한 생명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작가가 다루는 대상들은 모두 정신 질환으로 인해 겪게 된 잔상에서 기인한다.
어린 시절 이근민은 이유 모를 섭식 장애를 앓았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만 들어도 토할 정도로 음식에 공포를 느끼던 작가는 급기야 파편화된 인체와 썩은 내가 진동하는 시체 등이 등장하는 환각을 경험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럴 때면 작가는 스스로 피를 내 안도하곤 했다. 대학교 1학년 무렵 경계성 인격 장애를 진단받으면서 그는 환각을 수단으로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10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의사로부터 진단명과 진단 코드를 듣고 난 후 환각에 대한 시각이 조금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회가 나의 환각을 병증으로 정의내리기 전에 이를 캔버스나 미디어 매체에 옮긴다면 작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입원 중에도 작업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전했다.
작가는 자신의 내밀한 상처를 관객 앞에 서슴없이 내보인다. 하지만 기괴함이나 잔혹함을 의도적인 콘셉트로 내세우진 않는다. 과거 환각의 기억을 재조합하며 디자인하듯 무작위로 화면을 구성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작가는 “구도나 형상을 미리 정하지 않고 마치 세포가 분열하듯이 의식과 손의 움직임을 따라 그린다”며 “이성을 유지한 채 과거의 나를 관찰하며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작품의 인상이 강렬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보다 두려움이나 불쾌한 감정이 앞설 수 있지 않냐는 우려에는 “관객이 그렇게 느낀다면 나와 똑같은 감정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며 “그 감정들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흥미가 생겨, 내가 진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직접 찾아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날 전시장에 함께 나온 PKM 갤러리 박경미 대표는 “개인의 내면을 꺼내 보여준다는 게 작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데 이근민 작가는 특유의 경험을 바탕으로 화면에 이를 과감하게 구사한다”며 “이 지점이 관람객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동시에 회화라는 끝없는 심연의 세계로 이끄는 동력이 된다”고 소개했다. 전시는 7월 25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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