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 선율로 채웠다…81번째 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 국제음악축제

스메타나, 드보르자크, 야나체크의 나라. 말러와 모차르트가 사랑한 곳. 격변의 역사를 거치면서도 고유한 문화를 지킨 체코의 자존심은 예술로 표출됐고, 그 DNA는 수도 프라하에서 꽃피웠다.
1946년,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을 기념하며 시작된 ‘프라하의 봄 국제음악축제’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져 올해 81회째를 맞았다. 루빈스타인, 로스트로포비치, 오이스트라흐 등 20세기를 호령한 거장들이 이 무대를 거쳤다. 유럽 최고 권위의 클래식 축제 중 하나로, 아무나 설 수 없는 상징성이 있는 무대다.
올해 라인업에는 사이먼 래틀, 야쿠프 흐루샤, 클라우스 메켈레, 라하브 샤니 등 시대를 이끄는 지휘자들이 이름을 올렸다. 그 한복판에 한국인 음악가들도 섰다. 작곡가 진은숙은 상주 작곡가로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선보였고, 축제 기간 열린 ‘제77회 프라하 국제음악콩쿠르’에선 18세 피아니스트 손세혁이 우승을 차지했다.
올해도 수만 명의 관객이 국경을 넘어 프라하로 모여들었다. 36회 공연과 6회 마스터클래스가 진행됐다. 5월 12일 스메타나 서거일 페트로 포펠카가 프라하라디오교향악단과 문을 열었고, 6월 4일 다니엘레 가티의 드레스덴슈타츠카펠레가 베르디의 ‘레퀴엠’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유료 티켓 판매 3만500장, 좌석 점유율 98%. 전년 대비 3%포인트 상승한 수치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표방하는 이 축제는 그 어느 해보다 혁신적인 선율로 도시를 채웠다. 로베르트 한치 축제 총감독은 “장르는 물론 악기 조합과 프로젝트 측면에서도 관객에게 폭넓은 스펙트럼의 경험을 선사한 해”라고 했다. 냉전 시대 독재자를 향한 비판적 메시지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이 프라하 시민회관 스메타나홀에 울려 퍼졌다. 노래하며 지휘하는, 클래식계 혁신의 아이콘 바버라 해니건이 상주 음악가로 청중과 만났다.
새로운 물결과 함께 전통 클래식 무대도 탄탄한 중심을 잡았다. 사이먼 래틀이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과 슈만 교향곡 2번을 연주했고, 라하브 샤니와 로테르담필하모닉은 브람스 교향곡 2번으로 화답했다. 클라우스 메켈레는 오슬로필하모닉과의 마지막 공식 무대를 프라하에 새겼다.
한국경제신문은 프라하의 봄 국제음악축제에 주최 측과 체코관광청 초청을 받아 국내 언론사 단독으로 다녀왔다.
"작곡가로 프라하 첫 무대…동서양 경계 허문 30년 궤적 선보여"
상주 작곡가에 첫 한국인 진은숙

‘프라하의 봄 국제음악축제’가 81번째 생일을 맞아 파격적인 선택을 했다. 한국인 작곡가 진은숙을 상주 작곡가로 위촉한 것이다. 81년 역사상 한국인을 위촉한 건 처음이다.
진은숙은 명실공히 동시대 최고의 작곡가다. 2024년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을 거머쥔 데 이어 올해 3월 BBVA재단의 지식 프런티어상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제14회 대원음악상 대상을 받았고, 최근엔 독일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의 2026·2027 시즌 상주 작곡가로도 선정됐다. 지난 5월 30일 축제가 한창인 프라하 현지에서 진은숙과 만났다.
30년 인연이 프라하로
이번 상주 작곡가 위촉은 진은숙과 축제 측만의 합의가 아니었다. 세계 최정상 현대음악 단체인 앙상블모데른이 축제 상주 단체로 활동하며 공동 기획한 프로젝트다. 진은숙과 앙상블모데른의 인연은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앙상블모데른은 진은숙의 곡 ‘말의 유희’를 연주했고, 이후 그의 곡 대부분의 독일 초연을 맡았다.
프라하 봄 축제의 요세프 트르제슈티크 예술감독은 지난 3년간 베를린과 프라하를 오가며 기획에 공들였다. 그는 “앙상블모데른 디렉터와 몇 년 동안 진은숙에 관해 이야기했다”며 “우리가 꼭 가져오고 싶은 그의 음악이 많았고, 앙상블의 도움으로 비로소 (진은숙을) 프라하로 모실 수 있었다”고 했다.
진은숙은 이번 축제를 계기로 처음 프라하를 찾았다. “유럽에 40년 넘게 살았지만 공식 초청을 받아 체코에 온 것도, 이 페스티벌에 참가한 것도 모두 처음이에요.” 그럼에도 프라하는 낯설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밀란 쿤데라의 책을 다 읽었고 야나체크, 온드레이 아다메크처럼 체코 작곡가의 음악이 그들의 언어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을 눈여겨봤습니다. 직접 와서 확인하니 프라하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네요.”
이틀간 펼쳐진 진은숙의 회고록

5월 29일과 30일 양일간의 무대는 진은숙의 음악 일대기를 써 내려갔다.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한 작곡가의 언어가 30여 년에 걸쳐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프라하 관객 앞에 펼쳐 보였다. “제 커리어 초기, 중간, 최근작까지 세 곡의 음악 언어가 세월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작곡가의 예술적 궤적을 총망라한 회고이자 현대음악이 난해한 악보의 세계가 아니라 ‘소리의 경험’임을 보여주는 무대였다.
첫날 선보인 ‘말의 유희’는 죄르지 리게티 문하를 떠나 베를린에 정착할 무렵 쓴 초기작이다. 작곡가로서 극심한 슬럼프를 극복하게 해준 첫 앙상블 작품이라고 그는 회상했다. 진은숙이 창조한 ‘인공 언어’로 텍스트의 의미를 해체하고 순수한 음색의 유희를 강조했다. 소프라노의 정교한 발성과 목관악기의 섬세한 음색이 격자처럼 얽히는 곡이다. “지금 돌아보면 쓸데없이 음악을 어렵게 만든 부분이 분명히 있죠.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제 작품 앞에서는 늘 그렇습니다.(웃음)”
같은 날 연주된 ‘코스미기믹스’는 피아노 줄로 전혀 새로운 음색을 만들고 타악기의 불규칙한 마찰음으로 미지의 우주 공간을 청각화한 곡이었다.
이틀째 공연의 백미는 ‘구갈론’이었다. 깡통, 병, 나무 블록 등 일상의 오브제가 연주 도구로 등장했다. 타악기의 날카로운 타격과 현악기의 음색이 결합해 1960년대 한국 거리극의 분위기를 재현했다. 앙상블모데른은 작품의 그로테스크한 해학을 정교하게 극대화했다.
진은숙은 ‘구갈론’이 자신의 음악관을 바꿨다고 했다. 동서양의 이분법적 사고를 뛰어넘어 진은숙의 음악관이 정립된 곡이다. “1960년대 동네에 오던 약장수의 거리 공연 기억에서 출발했어요. ‘음악은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서구 중심적 강박을 스스로 허문 계기가 된 작품입니다. 서구의 테크닉과 한국적 기억, 양쪽의 영감으로 저만의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반응은 뜨거웠다. 이날 청중은 프라하는 물론 유럽 각지, 특히 진은숙의 활동 근거지인 독일에서 넘어온 이가 많았다. 그는 “많은 사람이 공감해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제 행보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팬들을 만나 놀랍고 감사했다”고 덧붙였다.
“브람스·베토벤과 다른 감동”
프라하 축제 상주 작곡가 위촉에 이어 최근엔 대원음악상 대상 수상까지 희소식이 쏟아졌다. “이제는 더 받을 상도 없는 것 같아요”라며 웃으면서도 그는 수상의 의미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꾸준히 상을 받은 게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됐어요. 중간중간 상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이어오기 어려웠을 겁니다.”
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으로서 그가 쌓아온 성과도 뚜렷하다. 한국의 남쪽 끝 소도시 경남 통영과 세계적인 음악의 만남은 진은숙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도전이었다. 그는 이 축제에서 지켜온 철학을 이렇게 말했다.
“기획의 주도권을 우리가 쥐고 라인업을 철저히 통제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젊은 연주자들이 세계 무대로 나가는 발판을 마련하는 일이에요. 클래식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해서 서양을 향해 고개를 숙일 이유는 없어요. 우리 안에서 세계적인 것을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은숙은 자신의 음악이 현대음악이라는 카테고리에 한정되는 것을 거부해왔다. 그럼에도 실상은 여전히 난해한 현대음악이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낙관했다.
“음악을 듣는 판도가 바뀌고 있어요. 제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말러는 (연주조차) 안 했어요. 근데 2000년대 들어 말러 붐이 일었고 귀가 트인 거죠. 현대음악이라도 다 좋은 건 아니에요. 필터링되겠죠. 브람스와 베토벤으로 줄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감정이거든요. 이제 그 감정을 발견하면 음악을 듣는 재미가 생길 겁니다.”
프라하=조민선 기자 sw75j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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