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색채로 파리 홀린 '한국의 피카소'
무속과 오방색의 화가 박생광
김기창·박래현 작품 한자리에
한국 현대 채색화 성취 조명

"단청이나 무속의 색깔을 보아라. 이 얼마나 강렬하고 현대적인가. 서양의 야수파 색채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생명력이 넘친다. 나는 이 오방색으로 세계와 승부하고 싶다."
1985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 전시를 앞두고 후두암 말기로 투병 중이던 박생광(1904~1985)이 피를 토하듯 쏟아낸 말이다. 그의 호언장담대로 그해 5월 열린 '르 살롱' 특별전에서 현지 비평가들은 그를 '한국의 피카소'라 부르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작 그는 병상에서 마지막 역작인 '전봉준'을 그리며 그해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K무속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데몬헌터스' 열풍을 타고 가장 힙한 장르로 부상했다. 일찌감치 이러한 무속의 힘을 알아본 작가가 내고 박생광이다. 만신 김금화의 굿판을 밤낮으로 쫓아다니며 캔버스 위에 오방색을 폭발시켰던 화가다.
1985년 파리 특별전 당시 공식 포스터로 사용돼 한국 채색화의 경쟁력을 세계에 알린 대표작 '무당'(1982)이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2층에 걸렸다. 지난달 말 개막해 미술 애호가들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는 '한국 현대 채색화의 정점' 기획전에서다.
이번 전시는 박생광과 함께 우향 박래현(1920~1976)과 운보 김기창(1913~2001) 부부가 나란히 이름을 올린 3인전으로 꾸려졌다. 작품 30여 점은 모두 가나아트재단 소장품이다.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이 오래전부터 수집했던 작품이다.
전시의 서막은 요즘 재평가가 활발한 박래현이 연다. 생전에는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남편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으나,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회고전을 계기로 '운보의 아내'라는 해묵은 꼬리표를 떼어냈다. 최근에는 박생광의 '무속' 시리즈와 더불어 '이건희 컬렉션' 해외 순회전에 나란히 포함되면서 국내를 넘어 세계 무대에서도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다
출품작 13점은 구상에서 출발해 입체주의와 추상화, 태피스트리, 판화를 거침없이 넘나들었던 그의 예술 세계를 총망라한다. 도쿄 유학생 출신의 부잣집 딸이었던 그는 1947년 청각장애를 가진 운보와 결혼해 남편의 귀가 되고, 네 자녀를 키워내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결코 붓을 놓지 않았다. 생애 후반기에는 미국 뉴욕에서 7년 가까이 머물며 판화와 태피스트리라는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기도 했다.
전시에서는 구상의 틀을 벗어나기 시작한 반(半) 추상의 작업인 '기도'(1959)를 비롯해 이른바 '엽전 시리즈'가 탄생한 1960년대 후반 추상회화와 말년인 1970년대 뉴욕 유학 시절 도전한 태피스트리 작업까지 다룬다.
청년 시절 이미 독보적인 '스타 작가' 반열에 올랐던 운보 김기창은 전통 산수와 구상, 추상의 경계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자유로운 화풍을 전개했다. 전시에서는 그의 입체주의적 시도의 연장선상에 놓인 1980년대작 '농악'과 역동적인 생동감을 분출하는 1959년작 '군상'이 주요작으로 출품됐다.
해방 후 왜색 시비에 휘말렸던 박생광은 말년에 이르러서야 전통 오방색(청·적·황·백·흑)을 전면에 내세우고 불교와 역사를 끌어오며 민족 화가로 거듭났다. 전시에선 그의 대표작 '무속 시리즈'와 함께 그가 가장 존경한 인물인 청담 스님을 모델로 한 대형 회화, '열반' 등 대표작 9점이 소개된다. 전시는 7월 5일까지.
[이향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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