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을 기반으로 성장한 마산의 역사·문화 깃든 제의 [경남 무형유산을 찾아서]
고려 초기부터 갑오개혁 때까지 조창 운영
안전 항해 기원하는 의례 봉행 등 해양문화 발달
1904년 수해로 부활…민간 주도로 성격 변화
동성동·중성동·서성동 등 6곳 조창 설치로 생겨
창동·두척동·쌀재고개·마재고개 등 지명에도 흔적
씨름 성지 연결 짓기도…탈놀이 시기도 차별화

교과서와 여행안내서, 미디어를 통해 자주 보게 되는 국가유산은 이미 상식처럼 익숙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지역으로 시선을 돌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경상남도에만 모두 41건의 무형유산이 지정돼 있다. 하지만 이름과 내용, 그것을 지켜온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지역 유산을 조명하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고, 그때마다 '기록의 필요성'과 '계승의 위기'가 이야기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관심은 쉽게 흩어진다. 이 기획은 단순히 지역 유산을 나열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지역의 시간과 감각 그리고 그것을 오늘까지 이어온 사람들의 현재를 차분히 따라가며 응원과 격려를 보내는 일이다.
마산 앞바다에 있는 돝섬해상유원지를 걷다 보면, 선착장 반대편에서 '월영대를 노래한 10인의 시비'를 만난다. 이 시비에는 통일신라 말 대학자 최치원(857~?)이 머물렀던 월영대를 찾은 고려와 조선 문인들의 시가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에는 여말선초 문신 이첨(1345~1405)의 시 '두척산'이 있다.
"높은 저 두척산 / 짙푸른 모습으로 구름 위에 솟았네 / 동남쪽으로 푸른 바다를 누르고 / 안개 구름 종일 어렸어라 / 옛적 고운 신선 / 숲 끝에 대를 이루었네 / 월영대를 소요하노라니 / 기(氣)는 가을 하늘과 더불어 아득하여라."


경상도 동남부 세곡 모여든 마산
마산은 과거 골포·나포·합포 등으로 불렸다. 지명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개 포(浦)' 자에서도 알 수 있듯, 바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지역이었다. 육지 깊숙이 들어온 마산만의 자연환경과 지리적 조건, 지정학적 특성은 이 지역만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했다. 경상남도 무형유산 '마산성신대제'도 그 산물 가운데 하나다. 그 배경에는 영남 조운 체계의 거점인 조창이 있었다.
경상도 동남부에서 거둔 세곡은 마산 조창에 모였다가 한양 경창으로 운송됐다. 이 조창은 고려 초기에 석두창, 원 간섭기에는 회원창으로 불렸다. 조선 초기 1403년(태종 3년)에 발생한 조운선 침몰 사고로 운영이 중단됐다가 17~18세기 대동법의 전국 확산·시행 속 1760년(영조 36년) 다시 설치됐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마산창이 폐지될 때까지 기능했다.
"밀려오는 고래 같은 엄청난 파도 위태로워 / 겨우 노량을 벗어나고는 십중팔구 엎어졌다네 // 늦은 봄 중순에 세곡 싣기를 마치고 / 좋은 날 받아 떠나려니 길은 아득도 하구나 // 다음 날 아침 깃발이 포구로 나가고 / 모든 배 점검하고는 북과 나팔소리 떠들썩하네 // 아아! 하늘이 응당 우리 관찰사의 정성에 감응했도다!"



지신밟기 시작으로 의례 봉행
"이 좋은 날, 우리가 소리를 내가지고 오늘 성신대제 할 쩐을 좀 벌어야 돼. 그래야 손님들도 푸짐하게 대접하고 할 것이요이. 그래서 가정마다 소리를 하는디, 이렇게 한 번 해볼게요이. 허야, 지신아."
5월 23일 창원시립마산음악관 야외무대. 마산성신대제 공개행사를 알리는 지신밟기가 시작됐다. 선창걸립패가 풍물을 울리며 잡귀와 잡신을 물리치고 흥을 돋운다. 이어 성신제(청행례-영신례-헌관례-망료례)가 봉행된다. 영신례에서는 축관이 성신고천문을 낭독한다. 성신을 맞이하는 절차다. 원칙적으로는 선고굿(성신목을 세우고 신의 영역임을 고하는 굿) 이후에 성신제를 지내나 이날은 지신밟기가 끝나고 봉행했다.
"자미대제가 별을 다스리시고 / 태을신이 십이궁 안에 계시네 / 북두칠성님이 이곳에 임하시면 성주가 되고 / 삼태성이 함께 비추면 어진 신하 되네 / 마산 주민 대표가 간절히 청하건데 / 성서로운 옥황상제와 이가 거느리는 별이 / 하늘로부터 지상에 강림하소서."
이후에는 성신목 모시기(산신제-신목 베기-목도하기-중천맥이굿)와 성신목 세우기(신목 좌정-선고굿) 순으로 의례가 이어진다. 하미(부정한 말을 못 하게 입에 무는 삼각형 모양의 종이)를 물고 신목으로 이동하고, 축문을 읽는 등 산신제를 올린 뒤에는 신목을 거둬 가겠다고 산신께 고한다.



민간 주도로 부활한 제의
세월이 흐르며 마산성신대제는 변천 과정을 겪었다. 1894년 시행된 갑오개혁으로 조세의 금납화가 추진되면서 조운 제도가 폐지되고, 조창을 기반으로 이어지던 의례도 자취를 감추고 신앙만 남게 된다. 그러나 1904년 마산에 대폭풍우가 들이닥치고 참화를 안기면서 제의가 부활한다. 지금의 마산어시장인 어선창에서 의례가 봉행되고 어상(수산물 상인)들의 기구인 합포사가 이를 주재한다.
이 과정에서 신격(神格·신으로서의 자격이나 격식)은 시장의 번영을 관장하는 장별신(場別神)과 결합한 해신(海神)적 성신(星神)으로 변모한다. 제의 목적도 '어시장을 오가는 모든 배의 무사 항해'와 '어시장의 번성을 통한 주민의 안녕'으로 확대된다. 이와 함께 관 주도로 이뤄지던 행사가 민간 주도로 바뀌고, 명칭에서도 별신(別神)은 별을 의미하는 성신(星神)으로 표기된다. 지금의 마산성신대제 명칭도 이때 비롯됐다.
성신굿(별신굿)을 끝으로 의례가 마무리되면 대동놀이를 한다. 이때 씨름도 한판 펼쳐지는데, 마산이 씨름의 성지인 이유로 조창과 연결 짓기도 한다. 1800년대 초에는 마산창의 조운선 수가 20척이었으며, 척당 1000섬을 실었다. 섬당 144㎏으로, 2만 섬의 세곡을 실으려면 조졸(조운 활동에 종사하는 선원)의 체력이 요구됐고, 이때 씨름을 통해 장사를 선발했다는 것이다.



조창 터 알리는 안내판만 덩그러니
현재 마산 조창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중성동·서성동·성호동 등 여섯 곳은 1663년(현종 4) 오산진(산호동 오산 남쪽 기슭에 있던 나루터)에 조창이 설치되고 인근 지역까지 발전하면서 생긴 마을로, 마산이라는 도시의 기틀이 됐다. 창동(倉洞)이라는 지명은 마산창이 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으며, 두척동·쌀재고개·마재고개 등에서도 옛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창동과 경계를 이루는 곳(남성동 142-3)에는 마산창의 관아로서 본당인 유정당을 일부 재현한 건물이 골목길 한편에 있다. '오직 바른 것을 지키는 곳'이었던 유정당은 1899년 마산항이 개항하면서 개항 업무를 보는 집무소로 성격이 바뀌었으며, 일제강점기 조창 부지를 가로질러 도로가 개설되면서 마산창의 건물들도 헐리게 됐다. 1918년에는 조창 자리에 조선식산은행 마산지점이 들어섰다.
시간이 흘러 임대 안내문이 나붙은 건물 한편에 '조창 터(유정당) 마산, 도시 근대화의 시작'이라는 제목의 안내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개항 이래 도시화 과정을 거치며 옛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나, 마산은 조창을 기반으로 발전된 도시이다'라는 설명과 함께 고지도, 1900년 4월 30일에 찍힌 흑백사진 속 유정당만이 이곳 마산의 옛 영화를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류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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