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진산성에서 내려다 본 임진강 초평도. 임진강이 범람하면서 토사가 쌓여 만들어진 초평도에는 6.25 전쟁 전 2가구 살았으나 전쟁으로 떠나고 이후 군부대의 포사격장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밀림같은 숲이 가득차 철새와 동식물 서식 낙원으로 바뀌었다. /이종태 기자 dolsaem@incheonilbo.com
지난 10일 오후 2시 파주시 파평면 두포리 임진강 전진교 검문소를 통과하자 풍경이 달라졌다.
분단 70여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민통선 북방.
차창 밖으로 펼쳐진 들녘은 초여름 햇살에 반짝였고, 군데군데 철책선이 그 풍경의 현실을 일깨웠다.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 땅이기에 오히려 자연은 더 깊고 넓게 살아남았다.
이번 탐방은 전진교를 지나 장남면 허준묘, 진동면 해마루촌, 그리고 덕진산성을 둘러보는 여정이다.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역사와 생태, 그리고 분단의 기억을 따라가는 길이다.
▲허준묘 이정표. 전진교를 지나 굽이굽이 좁은 도로를 따라 가자 의성(醫聖) 허준선생묘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이종태 기자 dolsaem@incheonilbo.com
▲ "다시 찾은 허준묘"
장남면 구암교(허준 호)를 지나 허준묘 입구에 들어서자 '다시 찾은 허준묘'라는 안내판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한때 허준의 묘는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후손들의 기록과 족보, 비석 조사를 통해 현재의 묘역이 허준의 묘로 확인됐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언덕길을 따라가자 녹음 속에 묘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조선 최고의 명의로 불리는 허준의 묘다.
▲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에 있는 허준(許浚, 1537~1615)선생의 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이다. 용천부사를 지낸 허론(許論)의 서자로 선조 7년(1574) 내의원(內醫院)에 들어간 후 혜민서 봉사를 거쳐 전의(典醫)로 발탁됐다. 선생의 묘는 확인되지 않다가 1991년 9월 30일 재미 고문서 연구가 이양재씨 등이 '양천허씨족보'에 기록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선좌 쌍분"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조사한 결과 발견됐다. 묘역은 약 50평 규모로 우측 묘는 부인 안동김씨의 묘로 추정된다. 이들 두 묘위에 허준선생의 생모로 추정되는 묘가 한 기 더 있다. 묘소에는 묘비, 문인석, 상석, 향로석 등이 배치돼 있으며 원래의 묘비는 두 쪽으로 파손되어 있다. 발굴 당시 원비의 마모된 비문 가운데 '陽平□ □聖功臣 □浚'이란 글자가 남아 있어 선생의 묘인 것이 확인됐다. 1992년 6월 5일 경기도 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됐다. /이종태 기자 dolsaem@incheonilbo.com
묘역은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이 먼저 다가왔다.
동의보감으로 백성을 살리고자 했던 의원의 삶처럼 묘역도 검소했다.
묘역에 서니 문득 "400년 전 전염병과 질병에 맞서 싸웠던 한 의사의 정신은 오늘날 의료 현장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은 새소리만 들릴 뿐 적막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서 허준이라는 이름은 오히려 더욱 크게 다가온다.
▲ 해마루촌: 파주 민간인 출입 통제선(민통선) 내에는 판문점의 대성동 자유의 마을, 통일촌(군내면), 해마루촌(진동면) 등 3개 마을이 있다. 그중 가장 마지막으로 조성된 마을이 해마루촌이다. 해마루촌은 통일대교나 전진교를 지나 상당히 들어가는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에 있으며, 휴전선으로부터는 남방 6.4㎞, 남방한계선으로부터는 4.4㎞지점이다. 해마루촌은 주민들이 '동파리'를 우리말로 재해석해 동(東)은 해, 파(坡)는 언덕을 뜻하는 마루를 붙여 지은 이름이다.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1953년의 정전협정에 따라서 정책적으로 조성됐고, 통일촌은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만들어졌다. 해마루촌은 6·25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장단군 주민들을 위해 1998년 조성했으며, 2001년 60가구 입주 당시 동파리 수복마을이라고 불렸다. /이종태 기자 dolsaem@incheonilbo.com
▲ DMZ 최북단의 희망, '해마루촌'
허준묘를 뒤로하고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논과 밭이 이어지는 길 끝에서 'DMZ 해마루촌' 표지석이 반긴다.
해마루촌은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장단 주민들이 다시 돌아와 정착한 마을이다. 민통선 안에 조성된 가장 늦은 정착촌 가운데 하나로, 남방한계선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은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농사철이라 마을 편의점 앞 벤치는 주인을 잃은 채 텅 비어있다.
'동파리 수복마을'이라는 옛 이름이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 해마루촌 마을회관 겸 휴게소 : 편의점과 공동식당이 있다. /이종태 기자 dolsaem@incheonilbo.com
실향민들이 반세기 만에 돌아와 일군 마을. 전쟁의 상처 위에 세워진 공동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평범한 농촌 풍경도 다르게 보인다.
철책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삶을 이어간다.
해마루촌은 분단의 상징인 동시에 복원의 상징이었다.
▲ 덕진산성은 파주시 군내면 정자리에 위치한 삼국시대 고구려가 축조했으며,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졌다. 6세기 중엽 고구려가 처음 내성을 축조했고, 통일신라기에 북방 방어를 위한 성곽으로 2차례 수보축되었으며, 조선시대 광해군 대에 외성이 축조됐다. 임진강 일대 고구려 방어체계를 보여주는 성곽으로, 통일신라와 조선시대에 걸쳐 축성법의 변화를 보여주는 유적이다. 1992년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 의해 처음 확인됐으며, 1994년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2004년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에 의해 지표조사 및 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2012년부터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4차례 축성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됐다. 2017년 1월 19일 사적으로 지정됐다. /이종태 기자 dolsaem@incheonilbo.com
▲ 임진강 절벽 위 '천년의 요새'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는 덕진산성.
산길을 따라 오르자 복원된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린 성벽은 생각보다는 단촐했다.
안내판에는 덕진산성이 고구려 시기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강을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강조하고 있다.
정상에 서자 왜 이곳에 성을 쌓았는지 단번에 이해가 됐다.
굽이치는 임진강과 산 넘어 불과 몇 킬로미터 거리의 북녘 산하가 한눈에 들어왔다.
가깝지만 갈 수 없는 땅이다.
성벽 위에 올라서니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진다.
천 년 전 고구려 병사들도 이 바람을 맞으며 남쪽을 경계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탐방객들이 같은 자리에 서서 분단의 현실을 바라본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흔적은 남는다.
덕진산성은 바로 그런 공간이었다.
▲ 임진강 : 덕진산성에서 내려다 본 임진강. 개성공단이 폐쇄되기 전 오전 오후 2차례 원·부자재와 완제품을 싣고 남북을 오가던 차량과 기차가 지나던 통일대교와 임진강 철교가 멀리 보인다. /이종태 기자 dolsaem@incheonilbo.com
▲ 철책 너머에서 만난 평화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다시 전진교를 향해 차를 돌렸다.
허준묘에서는 조선의 인술을 만났고, 해마루촌에서는 실향민들의 귀향 이야기를 들었으며, 덕진산성에서는 천 년의 국경과 마주했다.
민통선 북방은 단순한 안보 관광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거대한 역사박물관이었다.
철책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며 평화를 꿈꾼다. 분단의 최전선에서 오히려 평화의 소중함을 가장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전진교를 건너며 뒤돌아본 북녘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그리고 그 하늘 아래,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민통선의 풍경이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