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의사가 ‘언청이’ 고쳐준다”…폐허 속 한국에서 성형의 역사가 바뀐 그날

이번 주에는 조금 특별한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 합니다. 다가오는 주간은 성형외과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랄프 밀라드 선생님이 타계하신 지 15주기입니다. 오늘 칼럼은 1954년 척박했던 한국 땅에서 탄생한 위대한 수술법의 역사를 조명하는 추모 특집으로 준비해 보았습니다.
1955년 국제성형외과학회의 창립총회가 열리는 스웨덴 스톡홀름의 학회장이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의사들에게 주어진 발표 시간은 5분이었습니다. 5분이 되면 종료를 알리는 빨간 불이 켜졌고, 누구도 이 규칙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학회장 뒤편에 30대의 젊은 미국인 의사가 앉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발표 자료를 넘겨 보며 고민에 빠졌습니다.
'도저히 7분 이내로는 못 줄이겠는데….'
마침내 차례가 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연단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말을 시작했습니다. 모든 청중이 고개를 뒤로 돌려 그를 바라봤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제 스승이자 이 학회의 명예회장이신 길리스(Harold Gillies) 선생님께서는, 수술 시 조직을 다루는 성형외과의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필요 없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 절대로 버리지 말아라.'
오늘도 여러분께서 허락하신다면 저는 연단으로 걸어가는 이 순간까지, 발표 시간으로 쓰겠습니다. 토순(harelip, 토끼입술, 구순열의 과거 명칭)을 교정하기 위해 그 동안 여러 수술법이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두를 만족시키는 최선의 수술법은 아직 없습니다.
(중략)
제가 오늘 발표할 주제는 한국인의 토순을 대상으로 시행한 새로운 수술법입니다.
(후략)"
젊은 의사가 마침내 연단에 도착해 준비한 슬라이드를 띄우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슬라이드 속 한국 어린이들의 구순열 수술 결과는 이제까지 학계에 보고된 어떤 방식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났습니다. 기존 수술법으로 개선되지 않던 여러 난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었습니다.
그가 준비해온 발표를 모두 마칠 때까지, 시간 초과를 알리는 빨간 불은 켜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구순열 수술의 대표적인 표준 술식으로 시행되는 '밀라드법(회전-전진법)'이 세상에 처음 공개된 순간입니다. 이 젊은 의사의 이름은 랄프 밀라드(D. Ralph Millard, Jr., 1919~2011)였습니다. 이렇게 한국은 성형외과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됩니다. 지금도 성형외과 교과서에는 한국 어린이들의 구순열 수술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적인 수술법은 어떻게 한국 땅에서 태어났을까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재건성형외과는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전쟁으로 얼굴을 잃은 부상병들의 얼굴을 되찾아주는 일에 평생을 바치며 현대 성형외과학의 기틀을 세운 의사가 있었습니다. '현대 성형외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해럴드 길리스 경입니다.

랄프 밀라드는 세계적인 명의였던 스승 해럴드 길리스 경과 함께 성형외과 교과서를 집필할 정도로, 이미 학계에 알려진 실력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1954년 미 해병대의 소집을 받아 서울 인근의 해병대 이동외과병원(MASH) 군의관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그가 한국에서 수술한 첫 구순열 환자는 한국인 군무원의 일곱 살 아들이었습니다. 환자와 부모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전쟁 직후의 한국에서는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하지만 밀라드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입술 한가운데 남은 꺾인 흉터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환자의 사진을 화판에 세워두고 밤낮으로 들여다보며 고민하다 새로운 수술법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기존의 수술은 구순열 부위를 '비정상 조직'으로 간주해 잘라내고 남은 부분을 꿰매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밀라드는 "정상적인 입술 조직은 이미 다 존재하며, 단지 위치만 바뀌어 있을 뿐"이라고 발상을 전환했습니다. 조직을 잘라 버리는 대신 회전시키고 전진시켜,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옮겨주는 방법이었습니다. 단순한 수술 기법의 변화가 아니라, 구순열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바꾼 혁신적인 아이디어였습니다.


한국 아이에게서 세계 최초로 회전 전진법을 시행하는 역사적인 장면입니다. 수술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수술 후 흉터는 인중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감춰졌고, 입술은 아름다운 '큐피드 활' 모양을 되찾았습니다

'미군 의사가 언청이 수술을 해준다'는 소문은 곧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구순구개열이 있는 아이들이 소달구지를 타거나 아버지의 지게에 실려 병원을 찾아왔습니다.



환자가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나자, 금촌 민사처병원(현 경기도의료원 파주병원)으로 수술실을 옮겼습니다. 하지만 열악한 전후 상황 속, 병원에는 전기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두 의사의 눈물겨운 헌신이 이어졌습니다. 맑은 날에는 볕이 드는 곳을 찾아 수술대를 밀고 다녔고, 해가 지면 민사처병원 김주일 원장이 비춰주는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메스를 잡았습니다.
겨울에는 난로를 켜면 연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아 난방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털모자와 파카, 방한 부츠를 신은 채 수술을 이어갔습니다.

세계 성형외과의 역사를 바꾼 수술법은 최신식 병원이나 완벽한 연구실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전쟁 직후의 한국, 먼 길을 걸어 수술을 받으러 온 아이들. 그리고 손전등을 들고 수술실을 지킨 한국의 의사. 바로 그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특별한 인연은 성형외과의 역사에 빛나는 한 장면으로 남았습니다.


랄프 밀라드 선생님은 1955년 귀국한 이후 수많은 수술과 학술 활동을 이어가며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현대 안면성형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미국성형외과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2000년 '가장 위대한 성형외과 의사 10인'에 선정되는 등 세계적으로 존경 받는 거장이 된 그는 2011년 6월 19일, 향년 92세로 타계하셨습니다.

1955년 국립 금촌구호병원, 1957년 경기도립 금촌병원의 초대 원장을 역임한 김주일 선생님은 오랜 세월 파주 지역 사회와 환자들의 곁을 묵묵히 지켰습니다. 무려 95세까지 직접 진료를 이어가시던 선생님은 2023년 8월 16일, 향년 98세를 일기로 영면에 드셨습니다.
다음 주는 랄프 밀라드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 15주기입니다. 손전등을 들고 그의 곁을 지켰으며, 이후 평생을 소외된 이웃과 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김주일 선생님의 3주기도 곧 다가옵니다.
전쟁의 상흔이 가득했던 1954년의 척박한 땅에서, 국경을 뛰어넘은 두 의사의 헌신은 수많은 아이들의 얼굴에 미소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이들의 위대한 유산은 앞으로도 성형외과 역사의 가장 따뜻하고 빛나는 한 페이지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박준규 원장 (parks@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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