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투표용지 15만장...초유의 제주 무투표 당선
검증 기회 상실-주민 참정권 훼손

15만2126명.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제주도의원 선거 투표용지를 받지 못한 제주도민 숫자다. 제주도 전체 선거인수 56만5350명의 26.9%에 달하는 규모다.
제주 유권자 4명 중 1명은 이번 선거에서 도의원 선출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 동시에 32개 선거구 중 8곳의 출마자가 유권자들의 선택없이 무혈입성에 성공했다.
지난해 말 일찌감치 지방선거 출마 채비에 나선 인사는 100명을 웃돌았다. 비례대표를 제외하고 지역구 예비후보만 6개 정당에서 91명(무소속 6명 포함)에 달했다.
경쟁이 치열했지만 쏠림 현상은 도드라졌다. 당 지지도가 높은 더불어민주당에 예비주자들이 몰리면서 거대 정당 간 공천 분위기가 극과 극으로 갈렸다.
국민의힘은 출마자 모집부터 난항을 겪었다. 초유의 3차 공모에도 불구하고 후보자는 17명에 그쳤다. 결국 32개 선거구 중 절반에 가까운 15곳에서 선수를 내지 못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집권여당의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출마 예정자들이 줄을 지었다. 하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사태로 당은 곧바로 수렁에 빠져들었다.
당 지지도가 추락하고 보수지지 기반도 약화되면서 선거 포기와 불출마 선언이 잇달았다. 일부는 국민의힘을 탈당해 무소속 출마를 결심했다.
피해는 고스란히 유권자들에게 돌아갔다. 경쟁이 사라지면서 우리 지역을 위해 열심히 일할 풀뿌리 일꾼을 뽑는 기회 자체가 박탈됐기 때문이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190조 제2항에는 '해당 선거구에서 선거할 정수 범위를 넘지 아니하게 된 때에는 투표를 실시하지 않고 그 후보자를 당선인으로 결정한다'고 규정돼 있다.
제275조에 따라 단수 후보 등록과 동시에 선거운동은 중단된다. 제65조에 따른 선거공보 제출도 할 수 없다. 유권자에는 무투표 당선 안내문 한 장만 전달된다.
공식 선거운동이 금지되면서 유권자들의 알권리도 침해당했다. 토론회나 유세가 줄줄이 취소되면서 후보자의 공약과 의정활동에 대한 검증의 기회는 사라졌다.
가장 큰 피해는 참정권 침해다. 일도1·이도1·건입동, 이도2동갑, 화북동, 삼양·봉개동, 아라동갑, 애월읍을, 대천·중문·예래동, 남원읍에서는 15만2126명이 도의원선거 투표를 하지 못했다.
8곳 중 유권자가 가장 많은 삼양동·봉개동 선거구에서만 2만5752명이 참정권 행사에 제약을 받은 셈이다. 해당 지역은 도지사와 교육감, 정당 투표용지 3장만 주어졌다.
이에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단수후보에 대한 찬반 투표 도입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대의제에서 권한 위임을 위한 최소한의 선출 절차는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올해 초 정춘생 국회의원이 단수후보도 유권자의 30% 이상이 투표하고 과반수가 찬성해야 당선인으로 결정되도록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에 나섰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2022년에는 안병길 의원이 무투표 당선의 경우에도 선거공보를 작성하고 제출하도록 선거법 개정에 나섰지만 이마저 제21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법안이 자동 폐기됐다.
무투표 당선은 유권자의 선택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제도적 허점이 있다. 현재는 이른바 '지지하지 않을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당선인을 수용해야 한다.
견제 없는 권력은 책임성을 약화시키고 정치적 무관심을 불러올 수 있다. 무투표 당선인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선거를 치른 후보와 비교해 의정활동에서 소홀해지기 쉽다.
참정권을 박탈당한 유권자들도 정치적 효능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적 무관심은 풀뿌리 민주주의 기본 원칙인 주권주의를 약화시키는 악순환을 불러오게 된다.
선거에서 유권자가 배제되는 현 제도는 참정권 침해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제주 초유의 무더기 무투표 당선을 계기로 정치권에서도 제도 개선 논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