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조의 아트홀릭] "아! 이래서 유영국을 세 번 보러 가는구나"

■ 글 : 정승조 아나운서 ■
명령어 한 줄이면 그림이 나오는 시대.
요즘 서울시립미술관에는 같은 작품을 두 번, 세 번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손으로 색을 쌓아 올린 캔버스 앞에서요.
그 캔버스의 주인공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입니다.
지금 그의 역대 최대 규모 회고전이 한창입니다.
170여 점이 걸렸고, 그중 15점은 처음 공개되는 작품입니다.
전시장의 동선도 조금 낯섭니다.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구조인데요.
여기에는 기획자의 분명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정승조의 아트홀릭은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를 기획한 여경환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를 만났습니다.
■ 전시 제목이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입니다. 유영국에게 '산'은 눈앞의 풍경이 아니라 내면의 언어였다고 들었습니다. 이 제목으로 정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요.

전시의 제목을 정하는 일은 늘 어렵습니다. 전시 전체의 서사를 함축하면서도 대중적인 명확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 전시의 제목은 비교적 명쾌하게 결정되었습니다. 수많은 단어 사이에서 결국 제가 도달한 곳은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라는 유영국 작가의 문장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대목은 작가의 묘비명에 새겨진 글귀이기도 합니다.
이 제목은 유영국이 추구한 '산'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외부의 자극에 흔들리지 않고 예술적 내적 필연성을 따랐던 거장의 의지를 완벽히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중에게 가장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문장이었기에, 이 제목을 확정한 순간 도리어 기획자로서 큰 확신을 얻었습니다.
■ 작가의 묘비명에서 가져온 문장이라니, 그 무게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번 전시는 전형적인 회고전 방식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1964년 첫 개인전을 기점으로 시간을 역행했다가 다시 순행하는 구성인데, 관람객이 이 동선을 따라 걸으며 무엇을 경험하길 바라셨는지요.

회고전의 전형적인 구성은 초기부터 말년에 이르는 연대기 순으로 작가의 작품을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이 전형성을 탈피하고 싶었습니다.
유영국의 시간을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오직 그만의 '예술적 필연성'을 따라 전시를 새롭게 구조화하는 것이 기획의 핵심 접근법이었습니다.
작가가 오랜 그룹 활동을 접고 본격적인 전업 작가로서 홀로서기를 선언한 1964년을 기점으로 삼아 시간을 역행했다가 다시 순행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관람객들이 이 독특한 동선을 따라 걸으며 작가의 초기 실험과 만년의 추상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어떻게 하나의 본질로 연결되는지 입체적으로 경험하시길 바랐습니다.
나아가 "작가는 왜 이 시점에 이러한 예술적 결단을 내렸을까?"라는 능동적인 질문을 던지며 작가의 내면을 함께 탐험하듯 감상하셨으면 합니다.
■ 시간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한다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그 흐름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후기 작업을 '심상(心象) 추상'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제안하셨습니다. 이 시기를 기존과는 어떻게 다르게 읽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동안의 후기 작업들이 대개 기하학적 추상의 연장선이나 노년의 부드러워진 화풍 정도로만 납작하게 읽혔다면, 저는 이를 유영국 회화의 정점으로 바라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 '심(心)' 자에 형상 '상(象)'과 생각 '상(想)'의 의미를 중의적으로 담아 '심상(心象) 추상'이라는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외부의 자연을 재해석하는 단계를 넘어, 오랜 투병 생활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정신적 평화와 내면에 투영된 절대적인 자연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구현해 낸 과정입니다.
오랜 세월을 거쳐 비워내고 정제된 거장의 마음속 풍경을 이 '심상 추상'이라는 렌즈를 통해, 머리가 아닌 가슴과 세포로 온전히 느껴보시길 권합니다.
■ 머리가 아닌 가슴과 세포로 느껴보라는 말씀,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이번 전시에 미공개작을 포함해 170여 점이 걸린다고요. 관람객이 발걸음을 멈춰 오래 바라봤으면 하는 작품 한두 점을 꼽는다면요.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미공개작은 모두 15점입니다. 그중에서도 1989년작 '작품(Work)'은 작가의 집 식탁 앞에 10년 넘게 걸려 있던 특별한 작품입니다.
생의 하산길에서 빚어낸 이 풍경은 날카롭던 경계를 지워내고,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부드럽게 풀려 있습니다.
이 시기의 유영국에게 산은 더 이상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연을 향해 올리는 가장 정중한 헌사입니다.
단 몇 가지의 선과 색채만으로 완벽한 평온함을 주는 이 풍경 앞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깊은 호흡으로 머물러보시길 바랍니다.
■ 식탁 앞에 10년 넘게 걸려 있던 작품이라니, 그 자체로 한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 유영국이라는 거장을, 그것도 '한국 근대 거장전'의 문을 여는 첫 주자로 모시는 일이 가볍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끝내 전시장에 담지 못해 마음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그 뒷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유영국의 역대 최대 규모 회고전이자, 서울시립미술관의 새로운 전시 시리즈인 '한국 근대 거장전'의 포문을 여는 첫 프로젝트였기에 작품 확보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관과 개인 소장처에 흩어진 작품과 아카이브를 추적하는 과정은 지난한 여정이었습니다.
미처 소재를 확인하지 못했거나, 소장자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대여가 어려웠던 작품들, 그리고 전시장의 물리적 한계로 최종 라인업에서 제외해야 했던 수많은 수작(秀作)들이 여전히 마음에 남습니다.
큐레이터에게 이러한 아쉬움은 늘 남지만, 거장의 궤적을 온전히 펼쳐 보이고 싶었던 이번 전시에서는 그 아쉬움의 무게가 특히 더 무겁게 다가옵니다.
■ 그 아쉬움 속에서도 이렇게 큰 전시가 우리 앞에 펼쳐졌네요. AI가 이미지를 쏟아내는 시대에 손으로 색과 형태를 쌓아 올린 유영국의 회화가 지금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요.

디지털 스크린이 결코 구현할 수 없는 캔버스 고유의 마티에르(질감)와 압도적인 색채 대비는 매끈한 픽셀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매우 강렬한 감각적 자극을 줍니다.
명령어 한 줄로 순식간에 정교한 이미지를 찍어내는 생성형 AI 시대에, 유영국의 회화는 '인간이 몸을 관통해 이뤄내는 노동과 수행으로서의 예술'이 가진 본질적 가치가 무엇인지 되묻습니다.
격동의 한국사와 오랜 투병 생활 속에서도 타협 없이 묵묵히 캔버스 위에 쌓아 올린 견고한 색채의 덩어리들을 마주할 때 관람객들은 그 앞에서 시대를 초월한 예술의 진정성과 인간 내면이 지닌 단단한 힘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 '몸을 관통해 이뤄내는 노동과 수행으로서의 예술', 이 말이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유영국이라는 이름이 낯선 관람객이 전시장을 처음 찾는다면, 어떤 마음으로 둘러보길 권하시겠습니까.

"추상은 말이 없어 좋다"던 작가의 말처럼, 무언가를 분석하거나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전시장 문 앞에 먼저 내려놓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유영국 스스로는 철저히 공부하듯 작품을 치열하게 완성해 나갔지만, 관람객만큼은 자신의 작품을 온전히 향유하고 감각하기를 바란 예술가였습니다.
이번 전시가 제안하는 독특한 시공간의 흐름을 따라, 유영국의 삶과 예술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온몸으로 마주해 보시길 권합니다.
흥미롭게도 개막 이후 전시장에는 이미 작품을 여러 번 다시 보러 오시는 'n차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매일 스마트폰과 컴퓨터 디스플레이가 쏟아내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현대인들이, 도리어 유영국이 손으로 빚어낸 2차원의 밀도 높은 캔버스 앞으로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면서도 감동적입니다.
캔버스가 뿜어내는 강렬한 색채의 향연과 조화로운 형태의 변주 속에서, 관람객 여러분도 유영국의 깊은 산속이 주는 거대한 위로를 경험하고, 결국 나만의 내면의 산을 발견하는 경이로운 여정을 만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트홀릭 독자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사진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 2026년 한국 근대 거장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 전시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 일 정: ~ 2026년 10월 25일까지
- 관람 시간: 평일(화~목) 10:00~20:00, 매주 금요일 10:00~21:00, 토·일·공휴일 하절기(3~10월) 10:00~19:00 / 매주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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