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축제’ 사그라다 파밀리아 축복식... 교황 “예수 믿는다면서 전쟁할 수 없어”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복음 8장 12절)
10일 오후 9시 50분(현지 시각), 스페인 바로셀로나에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 상공 172.5m에서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십자가 불빛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교황 레오 14세는 이날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성가정) 성당에서 안토니 가우디(1852∼1926) 100주기 추모 미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탑’ 축복식을 주재했다.
교황은 탑 기단에 새겨진 ‘오직 주님만이 거룩하시며, 오직 주님만이 주님이시며, 오직 주님만이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는 명문(銘文)을 언급하며 “이 십자가는 낮에는 태양빛을 반사하며 빛나고, 밤에는 지중해를 향해 열린 등대처럼 도시를 비춘다”고 했다.
교황이 성수를 뿌리며 탑을 축복한 뒤 이윽고 십자가에 불이 들어오자 성당 안팎 수천명 참석자의 손에 들린 야광봉이 일제히 빛을 뿜기 시작했다. 일대는 삽시간에 빛의 바다로 돌변했다. 하늘로 떠오른 드론들이 가우디의 얼굴까지 그려내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에 맞춰 상공에선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착공 144년 만에 정점에 도달한 예수 그리스도의 탑 준공을 축하하는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였다.

교황은 이날 오후 7시 15분쯤 ‘포프모빌’을 타고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도착했다. 흰색 수단 차림의 그는 가우디가 안장된 지하 경당으로 내려가 제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잠시 기도했다. 이후 가우디의 묘소 앞에서 몸을 굽혀 촛불을 밝혔다. 성당 관계자의 설명을 듣는 교황의 표정은 숙연했다. 이후 교황은 스페인 펠리페 6세 국왕, 레티시아 왕비와 잠시 환담했다.
금색 제의와 주교관, 십자가 지팡이를 든 교황이 성당 남쪽 ‘영광의 파사드’ 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시각은 오후 7시 50분쯤이었다. 발코니에 자리한 성가대가 교황을 맞이하며 입당송 ‘너는 베드로다’(Tu es Petrus)를 합창했다. 참석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교황의 입당 행렬을 지켜봤다.
교황은 이날 “정녕 내가 나(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의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는 요한복음 8장을 주제로 강론했다. 교황은 “이 말씀은 협박도 위협도 아닌, 구원으로의 초대”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선을 주시려는 자유의 부르심이고, 악의 위협 속에서도 주님은 언제나 우리 편에 계신다”고 했다.

그는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전쟁을 조장할 수 없고, 예수를 믿으면서 무고한 생명을 죽일 수 없으며, 예수를 믿으면서 고통받는 이, 눈물 흘리는 이, 가난을 피해 도망치는 이를 외면할 수 없다”고 했다. 현재 미국·이란 전쟁의 긴장과 전 세계적인 반(反) 난민 기조를 의식한 발언으로 해석됐다. 최초의 미국인 교황인 레오 14세는 최근 전쟁과 폭력, 양극화, 이주민 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냈다. 특히 반전 메시지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각을 세워왔다.
교황은 “오늘 밤 이 대성전 꼭대기를 장식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마지막 된 자가 첫째가 되는 십자가이며, 죄인이 성인이 되고 죽은 자가 부활하는 십자가”라며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세 파사드가 이를 증언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성탄의 파사드에서는 가장 높으신 분이 우리를 위해 가장 낮은 자가 되셨고, 수난의 파사드에서는 희생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영광의 파사드에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신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영광에 이르려면 십자가라는 수난을 통과해야 한다고 강조한 교황은 ‘돌에 쓴 성경’이라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별명을 상기하듯, “믿음이 돌에 형태를 부여하고, 우리가 함께 거하는 건물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했다. 이어 “기도 안에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맺고 있는 근원적 관계를 발견한다. 그분은 우주에 당신의 영광을 새겨넣으신 예술가”라고 했다.
교황은 “뜨거운 신앙의 건축가였던 가경자 가우디는 이 공간을 설계하면서 주님의 생애의 신비를 이야기하고자 했다”며 “그가 제시한 영적 순례의 길은 우리를 위해 태어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이끄는 순례”라고 했다. 이어 “선종 100주기를 맞은 가우디를 기념하며, 이 위대한 사업을 가능하게 한 후원자들과 기부자들, 예술가들과 노동자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교황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분을 우러러보면서, 동시에 땅에 쓰러진 이들의 얼굴을 일으켜 세우기로 결심하자”며 전쟁과 가난, 빈곤 등으로 위협받는 전 세계의 약자들을 상기시켰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성당인 이유가 단지 세속적인 높이 경쟁 때문이 아님을 증명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날 추모 미사와 축복 행사는 3시간가량 이어졌다. 교황이 성당 내부와 외부 행사장을 오갈 때마다 통로엔 참석자들이 구름처럼 몰려 “비바 파파(Viva Papa·교황 만세)!“를 외쳤다. 교황은 이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줬고, 아기를 안고 나온 젊은 어머니들을 보자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아기들의 이마에 강복했다. 교황의 근접 경호원이 제지하는데도 교황에게 몸을 한껏 기울여 교황의 손에 입맞추는 수도자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참석자들은 밤 10시가 넘어 행사가 끝난 뒤에도 감동의 여운 때문인지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는 소니아(24)씨는 “전통 미사와 현대 기술이 결합한 정말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행사였다”며 “특히 교황이 우리 지역의 공식 언어이기도 한 카탈루냐어를 미사 때 사용해주셔서 너무 고맙다”고 했다.

미국인 리사 마틴(52)씨는 십자가 점등식 행사 때 성당 내부가 갑자기 어두워진 뒤 참석자들의 야광봉이 일제히 밝아지는 광경을 보더니 “도대체 내가 뭘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며 “이런 행사를 준비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너무 놀랍다”고 했다.

이날 미사엔 스페인 국왕 부부를 비롯,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 살바도르 이야 카탈루냐 자치정부 수반 등 교회와 정부 고위 인사, 시민 등 약 8000명이 성당 내외부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고, 인근 거리에 수만 명의 신자와 관광객이 몰렸다.
미사 시작 시간으로 안내된 시각은 오후 8시였지만 정오가 지난 뒤부터 입장 대기와 보안 검색을 받으려는 인파로 일대 교통은 이미 마비돼 있었다. 바르셀로나 경찰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반경 1km가량을 아예 통제했고, 곳곳에 기관단총 등으로 중무장한 경찰이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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