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년 전, 채제공도 관악산 기운을 받았다 [山文기행]

김세중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2026. 6. 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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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의 '관악산 기행'을 따라서
67세 봄에 철쭉 산행…노량진에서 출발, 관양능선 타고 연주대까지

글머리 퀴즈

관악산 정상을 가장 힘 안 들이고 오르는 방법은?

(정답은 맨 뒤에)

불성사 뒤 관양능선의 관음바위 뒤로 장군바위와 KBS 관악산송신소가 차례로 펼쳐져 있다.

번암 채제공(1720~1799, 이하 번암)이 예순일곱(이하 세는 나이) 살에 관악산 연주대를 다녀와 쓴 <관악산 기행>(원제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은 1984년부터 5년간 중학교 2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실렸고 지금도 EBS 수능 국어의 단골 지문이다.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db.itkc.or.kr)에서도 국역을 원문과 함께 볼 수 있다.

철쭉꽃이 마지막 붉은빛을 토해 내던 5월의 첫 주말에 번암의 그날 코스를 따라가 봤다.

자하 신위 집안의 일간정

1786년 병오년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10일). 번암은 몇 년째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노량진 집을 함께 나선 일행은 하인 빼고 양반 어른만 일곱 명이었다.

"10리쯤 가서 자하동으로 들어가 한 칸짜리 정자 위에서 쉬었는데, 정자는 신씨申氏의 장원莊園이었다. (중략) 언덕 위에는 철쭉이 한창 피어 있어 바람이 불면 그윽한 꽃향기가 수시로 물을 건너 풍겨 왔다."(이하 고전번역원 국역)

채제공 초상. 관악산 다녀온 3년 후인 1789년(70세) 때 모습이다. 이미지 공유마당

관악산 동서남북이 다 자하동이다. 번암 일행이 들어간 자하동은 서울대 앞 신림천(도림천의 최상류) 일대 '북자하동'이다. 어디부터 10리를 들어갔다는 것일까? 산길 정취가 제법 나기 시작하려면 지금 미림여고삼거리(서울대벤처타운역)나 녹두거리 입구쯤은 돼야 하지 않을까.

'한 칸짜리 정자'는 사실은 '일간정一間亭'이라는 정자 이름이다. 신씨란 자하 신위(1769~1845, 이하 자하) 집안이다. 자하 고조부 형제가 이곳 북자하동에 별서別墅를 두고 있었고, 자하 자신도 만년에 이곳에 돌아와 북자하동과 동자하동(과천)을 넘나들며 글을 지었다. 고조부 형제는 이곳에 이로당二老堂과 일간정을 지었다. 번암 일행이 쉰 정자가 그 일간정이다.

일간정이 있던 일대는 지금 관악산야외식물원과 호수공원이 돼 있다. 호숫가에 '자하정紫霞亭'이라는 정자도 지어 놓았다. 자하 흉상도 세웠는데, 설명글에 자하가 여기 살았단 말은 없었다.

채제공의 『번암집』에 실린 '유관악산기'. 이미지 한국고전번역원

저물녘 산속에서 길을 잃다

일간정에서 더 가 제4광장에서 왼쪽 시내 계곡으로 올라가는 게 관악산 주등산로다. 그런데 번암 일행은 왼쪽으로 틀지 않고 직진했다.

"다시 10리쯤 가니 길이 험준하여 말을 탈 수 없었다. 거기서부터는 탔던 말과 마부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가며 칡넝쿨을 뚫고 도랑을 건넜다."

관악구와 안양시, 관악산과 삼성산의 경계이고 도림천과 안양천의 분수령인 무너미고개를 넘은 것이다. 고개 넘으면 안양천의 최상류다. 일행은 그 도랑을 건너 계속 갔고, 어디쯤에서 산 쪽으로 틀었다가 그만 길을 잃었고, 해거름이 가까웠다.

"일행 중 숙현(이광국, 당시 65세)이 문득 사라져서는 오래도록 나타나지 않더니, 이윽고 스님 네댓을 이끌고 돌아왔다.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듯 스님들 따라간 절 이름은 불성암佛性庵이었다."

불성암은 어디일까? 안양 쪽 주능선인 관양능선에서 팔봉능선이 갈라지는 지점 바로 아래 태고종 불성사라는 절이 있다. 불성암이 바로 이 불성사라고 보면 글의 행간과 글 밖의 역사가 잘 꿰어진다.

번암 일행은 처음부터 불성암에 묵을 요량이었다. 불성암이 불성사라면, 무너미고개에서 거기 가는 길은 두 개다. 고개 넘자마자 왼쪽으로 도랑을 따라 팔봉계곡 끝까지 올라가 팔봉능선 가슴께를 질러가는 길과, 도랑 건너 안양 방면으로 한참 내려가다 서울대 관악수목원 후문에서 계곡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일행은 도랑 건너 팔봉능선 초입을 지난 뒤 성급하게 산 쪽으로 들어섰다가 길을 잃었다. 숙현이 팔봉능선의 왕관바위 근처 제2~3봉쯤으로 올라가 눈으로 절 위치를 확인하고 가서 스님들을 데려온 것이었다.

일간정이 있던 근처 관악산호수공원 내 자하정.

南人 허목·이익도 거쳐 간 불성암

글의 처음과 끝에서 번암은 '미수 허선생眉.許先生'이 여든세 살에 관악산에 오른 일을 거듭 이야기한다. 미수는 허목(1596~1682)이다.

번암은 당대 남인南人의 영수領袖였고, 그 100년 전 노론老論의 송시열과 맞장 뜬 남인의 거두가 미수였다. 미수의 관악산 기행은 그의 문집 『미수기언眉.記言』 중 <무오기행戊午記行> 안에 짧게 나온다. 1678년 음력 4월 17일 "금양衿陽의 이문충공 묘를 참배하고 관악산을 유람하였다"고 썼다. 금양은 지금 금천구와 광명시 일원이고, 이문충공은 미수 처조부 이원익인데 그 묘가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 그는 "서자하 수마제須摩題(안양)로부터 '불성'을 지나 '영주대靈珠臺'에 올랐다"고 썼다. 불성이 바로 불성암일 것이고, 영주대는 관악산 정상 연주대의 이명異名이다.

번암의 스승이고 역시 남인인 성호 이익(1681~1763)도 1707년 음력 2월에 관악산을 다녀와서 <유관악산기>를 썼는데, 역시 '불성암'에 묵고 '영주대'에 올랐다고 했다.

꼭 남인들이라서가 아니라, 익히 읽고 들어 '검증된 불성암'을 번암도 베이스캠프로 잡은 것이다.

정수영鄭遂榮이 1796~1797년 한강과 임진강 일대를 유람하고 그린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부분) 속 일간정. 이미지 공유마당

관양능선 암릉길로 연주대까지

번암 일행은 새벽밥 지어 먹고 건장한 스님들을 앞세워 연주대로 향했다. 스님은 정상이 10리 남짓이라 했는데 실제는 2km가 채 못 된다.

"마침내 절 뒤로 넘어가 산마루로 갔다. 길이 깎아지른 벼랑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그 아래는 천 장 낭떠러지였다. (중략) 거대한 바위가 길 등성이를 온통 차지하기도 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는데, 험준한 곳 가운데 심하게 깎아지르지 않은 곳을 골라 엉덩이를 붙인 채 두 손으로 옆을 지탱하며 건넜다."

불성사 뒤 산마루라면 관양능선 암릉, 관음바위 바로 직전의 국기봉쯤 된다. 암릉 동쪽(과천)은 낭떠러지다. 번암 일행은 관음바위~장군바위를 사족보행으로 지나 지금 KBS 관악산송신소까지 내내 암릉을 탔다. 송신소부터는 안부다. 그렇게 연주대 아래에 닿아 올려다보니 먼저 오른 사람들이 낭떠러지 아래로 위험하게 굽어보기에 사람을 시켜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라고 소리 지르게 했다.

"정상에는 바위가 펼쳐 있어 수십 명이 앉을 정도였는데, '차일암遮日巖'이라고 불렀다. 옛날에 양녕대군이 왕위를 피해 관악산에 와서 머무르며 때때로 이곳에 올라 궁궐을 바라보았다. 이글거리는 햇살이 따가워 오래 머무를 수 없을 때면 작은 장막을 펼치고 앉았다. 바위 귀퉁이에 꽤 오목하게 파인 구멍이 네 개 있는데, 장막의 기둥을 설치했던 곳이다."

팔봉능선과 관양능선이 만나는 지점 아래서 내려다본 불성사.

관악산 정상 연주대가 운발이 좋다는 속설 때문에 요 몇 달 찾는 이들이 갑자기 늘어나 몸살을 앓는 중이다. 내가 간 날도 정상 인증석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인증석 있는 바위는 관악산의 진짜 정상이 아니다. 진짜 정상은 관악산기상관측소의 하얀 레이더 보호돔dome 옆, 통행이 금지된 불꽃바위(횃불바위)다. 양녕대군 '차일암'과 바위에 구멍 네 개는 아마 그 정상부 근처에 있었던 모양이다.

멀리 소나무 빽빽한 경복궁 터가 보였다. 벼슬 떠난 번암은 임금을 그리워하는 짧은 고시古詩를 하나 지어 읊었다. 그리고 불성암으로 돌아와 하루 더 묵고 노량진 집으로 돌아왔다.

번암은 글 마지막에 다시 미수를 들먹인다.

"천지신명의 도움을 받아 내가 만약 83세에 이른다면 비록 실려서 오더라도 반드시 다시 이 대에 올라 고인의 자취를 계승할 것이니, 그대(숙현)는 부디 기록해 두게나."

숙현도 "그때 저도 마땅히 따라오겠습니다"라고 화답했다.

관악산의 기를 받아서일까, 그해 번암은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화려하게 관직에 복귀한다. 이후 영의정 없는 좌의정(국무총리대행) 겸 수원 유수留守로서 정조正祖의 화성華城 성역城役을 총지휘했다. 영의정에 올라 과천 동자하와 안양 서자하 길로 정조의 화성 능행陵行들을 수행했다. 다만 1799년 80세로 졸卒하는 바람에, 83세에 다시 오겠다던 그날의 공약을 지키지는 못했다.

연주대 정상석 뒤에서 본 인증샷 행렬. 관악산의 진짜 정상은 뒤편 레이더 보호돔 옆 불꽃바위(비탐)다.

글머리 퀴즈 정답

관악산 연주암에 템플스테이를 예약하면, 추가요금을 내고 과천~KBS 송신소를 왕복하는 케이블카를 탈 수 있다.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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