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여성들은 어떻게 ‘탁월한’ 피해자가 됐는가

이명희 기자 2026. 6.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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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소셜미디어에서 낯선 사람으로부터 메시지를 받는 순간 ‘지옥’ 문이 열린다. 누군가 가짜 계정을 만들고, 피해 여성인 척 친구 아버지에게 성적 콘텐츠를 보내거나 남자친구에게 “여자친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거짓말을 퍼뜨려 인간관계를 파탄내는 것이다. 계정을 차단하면 거친 숨소리만 내는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온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전혀 알 길 없는 여성들은 공포에 떨다 일상이 부숴진다. 공포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는 영국에서 사이버 스토커 매슈 하디가 수많은 여성을 상대로 수년 동안 벌인 범죄 행각의 일부다. 이 사건은 2022년 가디언의 시린 케일 기자가 최초로 보도했고, 넷플릭스 범죄 다큐멘터리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에서도 다뤄졌다.

2011년부터 2021년 기소될 때까지 하디의 범죄 대상이 된 여성은 수백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어떻게 오랜 세월 동안 법망을 피할 수 있었을까. 피해 여성들은 경찰을 찾아갔지만, ‘소셜미디어 계정을 삭제하라’는 섣부른 훈계를 듣거나 ‘강간·살인 같은 실제 위협이 없다’는 이유로 수사를 거절당했다. 2019년에야 한 경사의 의지로 수사가 시작됐지만, 하디를 법의 심판대에 세울 수 있었던 결정적 한 방은 피해 여성이 수집한 700페이지 분량의 증거 문서였다. 법률 보조원 경험이 있는 피해 여성이 자신과 주변인들에게 하디가 보낸 모든 메시지들을 캡처하고 색인을 달아 분류해둔 덕분이었다. 마침내 하디는 2022년 8년형을 받고 수감됐다.

스토킹 범죄, ‘위협 없다’며 수사 거절
되레 가해자 쪽으로 기운 사법시스템
피해자가 피해 입증하는 ‘아이러니’
이런 사회는 ‘가해자’ 단죄할 수 없어

나는 곽아람 조선일보 기자가 자신의 스토킹 피해를 기록한 르포르타주 <탁월한 피해자>를 최근 출간했다는 기사를 읽고, 이 다큐가 생각났다. 배경만 영국일 뿐 우리도 많이 보고 들었던 얘기다. 7년 전부터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스토킹 피해를 당한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일곱 차례의 소송을 진행하는 동안 처음엔 호의적이었던 회사는 도중에 소송 관련 지원을 끊으려 했고, 경찰·검찰과 법원은 끝없이 피해를 입증하라고 했다. 피고인이 된 가해자는 ‘방어권’을 십분 누리며 교도소에서도 편지를 보내 추가 범행을 저질렀는데, 이를 막아달라는 요청에 “서신 발송은 수용자의 권리”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명문대’를 나오고, 기자이며, 탄탄한 인맥을 가진 그에게도 이럴진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피해자들에겐 오죽하랴 싶다. 신문에 옥중 스토킹 사연이 실리고 방송사의 취재가 시작되기 전까지 사법시스템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보호하는 쪽이었다. ‘탁월한 피해자’란 책 제목엔 이런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탁월한 피해자’란 결국, 제 삶을 걸고 싸워서 정의를 실현시키는 사람들이다. 시인 박진성씨의 성폭력을 폭로한 ‘98년생 김현진’씨,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씨(가명)도 그렇다. 지난 4월 생을 마감한 ‘98년생 김현진’씨는 ‘가짜 미투’라고 매도하는 가해자와 이를 옹호하는 사회와 싸워야 했다. 박씨를 감옥에 보내는 데 7년이 걸렸다. 김진주씨는 부실수사로 묻힐 뻔했던 가해자의 성범죄 혐의를 직접 밝혀냈다. 지난달 5일 광주 도심 한복판에서 살해당한 이채원양은 열일곱 살이었다. 장윤기는 스토킹하던 다른 여성을 살해하려다 수포로 돌아가자 귀가하던 채원양을 해쳤다. 부모는 딸이 당한 일이 또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며 딸의 실명과 초상화를 공개했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로선 결코 쉽지 않았을 일이다.

문제는 누가 피해자가 되느냐다. ‘피해자’라는 이름은 ‘나는 피해자다’라고 강하게 주장할 때 획득된다. 그렇지만 피해를 입증하고 싸워야만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특히나 범죄 피해 여성의 아픔을 들어주거나 대신 말해주는 데는 무관심했다. 오히려 의심하고 몰아세우는 양상이 반복됐다. 피해자들의 ‘침묵’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이채원’이란 이름을 잊지 말아달라는 부모의 호소는 이런 사회에 대한 책망 같아 아프다. 지금도 서로 다른 이유의 ‘탁월하지 않은 피해자’들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옆에 우리가 있어야 ‘가해자’를 제대로 단죄할 수 있다.

이명희 논설위원

이명희 논설위원 mins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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