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메모리 이어 기판도 품귀 … 빅테크 "돈 댈테니 물량 달라"
AI 반도체 공급망 병목 심화
비용보다 물량확보 더 우선
기판도 '선투자·장기계약'
삼성전기 등 생산확대 한계
후발주자 LG이노텍에 기회

"투자비를 댈 테니 기판 물량부터 확보해달라."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에서 공급망 확보 경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고대역폭메모리(HBM)가 가장 구하기 어려운 부품이었다. 이후 범용 D램과 낸드플래시 공급 부족 우려가 커지더니 최근에는 반도체 기판이 새로운 병목 구간으로 떠오르고 있다.
구글과 퀄컴 등 빅테크는 물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메모리 업체까지 생산능력 확대를 요구하며 AI 반도체 기판 업체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업계에서는 AI 반도체 공급망의 주도권 경쟁이 이제 칩과 메모리를 넘어 기판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AI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면서 과거 HBM 시장에서 나타났던 '선투자·장기 계약' 구조가 기판 시장에서도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 공장 세워도 양산까지 최소 2년
반도체 기판은 흔히 반도체의 '도로'나 '신경망'으로 불린다. 반도체 칩을 올려놓고 전력과 전기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AI 칩을 만들더라도 이를 연결하는 기판이 부족하거나 성능이 떨어지면 최종 제품 생산은 불가능하다.
최근 AI 데이터센터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기판 수요는 폭증하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마켓리서치인텔렉트에 따르면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FC-BGA) 기판 시장 규모는 2024년 15조원에서 2031년 35조원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구글의 텐서처리장치(TPU), 각종 AI 가속기에는 서버용 FC-BGA가 필수다. HBM과 GDDR7, 소캠 등 차세대 메모리에는 고사양 플립칩 칩스케일패키지(FC-CSP)가 대거 사용된다. 문제는 공급이다. 기판은 생산라인 구축부터 양산까지 통상 2년 이상이 걸린다. 설비를 발주한다고 바로 생산 가능한 구조가 아니다. 고난도 공정 기술도 필요하다. 업계에서는 "지금 증설을 결정해도 실제 대규모 물량은 2028년 전후에나 공급된다"는 말이 나온다.
◆ 왜 LG이노텍에 수요 몰리나
LG이노텍은 이러한 수요 폭증에 대응하기 위해 구미와 베트남 하이퐁을 중심으로 내년 말까지 2조원 이상을 투입해 AI 반도체 기판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신규 거점으로 키우는 하이퐁에 생산설비 구축을 마친 뒤 2028년부터 대량 양산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AI 서버용 FC-BGA 기판 시장은 삼성전기와 일본 이비덴, 대만 유니마이크론 등이 장악해왔다. 하지만 최근 AI 서버 투자 붐으로 주요 업체들의 생산능력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 결국 고객사들은 새로운 공급처를 찾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LG이노텍이 부상했다. 업계 관계자는 "주요 업체들은 이미 상당수 생산라인이 장기 고객사 물량으로 채워졌다"며 "신규 고객 입장에서는 추가 물량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LG이노텍은 서버용 FC-BGA에서는 후발주자로 분류되지만 대규모 투자 여력이 있고 글로벌 고객사들과 긴밀한 네트워크도 확보했다. 모바일용 무선주파수 시스템인패키지(RF-SiP) 기판 시장에서 세계 1위 자리를 오랫동안 유지하며 축적한 기술력과 생산 노하우가 강점으로 꼽힌다.
최근 AI 반도체 시장이 확대되면서 서버용 FC-BGA뿐 아니라 GDDR7과 소캠 등 차세대 메모리에 사용되는 고성능 기판인 FC-CSP 수요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그동안 수익성이 높은 AI 서버용 FC-BGA 기판 투자에 집중되면서 FC-CSP 공급 여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졌다고 보고 있다.
◆ 구글·퀄컴·삼성·SK 등 구애
더 주목되는 것은 거래 방식이다. 과거 반도체 기판 업계에서는 공급 업체가 투자 결정을 내리고 고객사를 확보하는 구조가 더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AI 공급망에서는 반대로 고객사가 먼저 투자비 지원을 제안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일부 글로벌 고객사는 생산라인 증설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는 대신 장기 물량 확보를 요구하고 있다. 또 일정 수준의 영업이익률을 보장하거나 가격 변동 폭을 사전에 정하는 장기공급계약(LTA) 방식도 논의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과거 엔비디아가 HBM을 확보하기 위해 메모리 업체들과 체결했던 방식과 유사하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LG이노텍이 추진 중인 신규 반도체 기판 투자 가운데 상당 부분을 고객사 지원금으로 선충당하는 방안도 논의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가격 협상이 핵심이었다면 지금은 물량 확보가 보다 중요하다"며 "가격을 조금 더 주더라도 공급망을 먼저 확보하려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박소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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