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구심점없는 잠실 집회…“이번 주말이 분수령될 것 같아요”
인쇄 현수막, 피켓 대신…흰 도화지에 직접 손글씨로 개인 생각 작성
기성 언론에 대한 불신 커…스레드·인스타그램 등 SNS로 정보 교환
(시사저널=이태준 기자)

사상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촉발된 서울시민들의 항의 집회 닷새째, 지도부가 없다. 협의체도 없고, 대변인도 없고, 취재 창구도 없다. 그런데도 9일 밤 올림픽공원역 앞은 여전히 사람들로 채워졌다. 아무도 이끌지 않는 집회가 5일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집회가 시작된 지 일주일이 다 돼 가는데 구심점이 없어요. 솔직히 걱정됩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참여자의 말이었다. 걱정하면서도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 집회의 모습이 바로 그랬다.
밤 11시30분, 역 출구를 나서자 "부정선거 재선거"라는 구호가 먼저 들렸다. 참여자들은 한 군데 모여 있지 않았다. 크게 다섯 무리로 나뉘어 각자의 자리에서 구호를 외쳤다. 한 무리에서는 참여자들이 머리를 숙이고 기독교식 목례를 올리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경찰은 20~30명 안팎이 산발적으로 배치돼 있었다. 자극하거나 제지하기보다 현장을 지켜보는 수준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어서 중장년·노인층은 드물었다. 주축은 20~30대였고, 일부 10대도 눈에 띄었다. 여성 참여자 비율도 상당했다. 30대 시민 한정민씨는 "지난 주말엔 사람이 더 많았다. 오늘이 오히려 적은 것"이라고 했다.
이 집회가 진행되는 방식에는 지침이 없었다. 손에 든 것은 인쇄 현수막이나 정갈한 피켓이 아니었다. 흰 도화지에 손으로 직접 적은 네 가지 구호가 바로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목소리였다. '부정선거', '재선거', '당일개표', '수개표'. 정치적 목적성을 띤 조직과의 연계 의혹을 차단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선택이었다. "정치색이 들어가면 집회 취지가 훼손된다"는 인식이 참여자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었다.

낮 참여자-밤 참여자, '순환 근무'하듯 교대
현장 운영도 마찬가지였다. 이름 모를 자원봉사자들이 빵과 물, 초코파이, 피자를 나눠줬다. 취재 중인 기자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배급을 맡은 한 자원봉사자가 피자 한 조각과 사이다 한 캔을 건네며 말했다. "콜라가 다 떨어져서 사이다로 드려요." 집회가 끝난 자리는 참여자들이 직접 치웠다. 강제도, 지시도 없었다. 운영 시간도 자율이었다. 자정에 인원이 가장 많고, 이른 아침 6시까지 이어졌다. 낮 참여자와 밤 참여자가 순환 근무처럼 자연스럽게 교대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돌아가는 구조였다.
한편 내부에서 목소리가 갈리는 지점도 있었다. 성조기를 든 참가자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다수는 태극기를 들었고 자원봉사자들이 한켠에서 배포하기도 했다. "집회의 순수한 취지가 희석될까 봐 걱정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부정선거 주장자로 알려진 전한길씨도 현장에 나타났다가 "나로 인해 집회 의미가 왜곡될 수 있다"며 스스로 물러섰다. 앞서 일부 언론이 보도한 소지품 검사는 이날 현장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집회를 지탱하는 또 다른 동력은 기성 언론에 대한 불신이었다. 참여자들이 정보를 주고받는 통로는 스레드·인스타그램 등 2030 세대가 주로 쓰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였다. 처음부터 공식 취재 창구가 없었던 것도 그 연장이었다. 기자들도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했다.
그러나 집회 안에서도 지속 가능성에 대한 물음은 나왔다. 한 참여자는 4·19혁명을 꺼내 들었다. "3월에 시위가 시작돼 한 달 만에 이승만이 하야했는데, 이번 집회는 일주일이 다 돼 가는데 구심점이 없잖아요."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곧 축구 시즌이 시작되잖아요. 남성 청년들의 관심이 분산될 수도 있어요." 집회 주축인 20~30대 남성들이 시즌 개막 이후에도 지금의 동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이 안에서도 자신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20~30대만의 동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도 참여자들 스스로 인정했다. "구심점이 생기거나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지금 이 흐름을 끌고 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이번 주말이 이 집회의 진짜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말이 현장 안팎에서 나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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