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만으로는 부족하다”…LA 산불이 강원 동해안에 던진 경고
태평양 앞까지 번진 말리부의 화마
양간지풍·샌타애나 서로 닮은 위험
소방력 한계 인정한 패서디나 대응
주민 교육으로 채운 생활권 방재망

지난해 1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를 덮친 화마는 ‘천사들의 도시’를 순식간에 지옥으로 바꿔놓았다. 해안 부촌으로 알려진 퍼시픽 팰리세이즈(Pacific Palisades)와 LA 동북부 이튼 캐니언(Eaton Canyon) 일대에서 시작된 산불은 강한 바람을 타고 주택가로 번졌다.
캘리포니아 산림화재보호국(CAL FIRE)에 따르면 팰리세이즈 산불은 9,489㏊를 태웠고, 이 과정에서 구조물 6,845동이 파괴됐으며 12명이 숨졌다. 이튼 산불도 피해 면적이 5,674㏊에 달했다. 구조물 9,419동은 잿더미로 변했다. 19명의 목숨 역시 앗아갔다. 산에서 시작된 불은 짧은 시간 안에 생활권으로 파고들었고, 주택과 도로가 한꺼번에 얽힌 재난으로 확대됐다.

■ 바다 앞까지 내려온 불길…강원 동해안과 닮은 위험 구조=지난달 26일 찾은 LA 말리부(Malibu) 일대에는 산불의 상처가 여전히 선명했다. 태평양을 끼고 이어진 해안도로 바로 옆까지 불길이 내려온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바다를 마주한 식당과 상가, 주택 일부 등은 뼈대만 남은 채 사라졌고, 산비탈은 그을린 채 황무지처럼 드러나 있었다. 한쪽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지만, 고개를 돌리면 불에 탄 언덕과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말리부 피해가 컸던 이유는 산과 바다 사이의 좁은 생활권 구조에 있었다. 샌타모니카 산맥에서 시작된 불길은 샌타애나 바람을 타고 협곡과 능선을 따라 해안 쪽으로 밀려 내려왔다. 건조한 바람은 식생의 수분을 빼앗고, 불씨를 멀리 날려 보냈다. 산 아래로는 퍼시픽코스트하이웨이(PCH)와 주택, 식당, 상가가 이어져 있어 불길이 생활권으로 번지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강한 샌타애나 바람과 비정상적으로 건조한 날씨는 산불을 해안 주거지까지 밀어붙였다.

LA 산불은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안에도 낯설지 않은 경고다. 강원 동해안과 남부 캘리포니아는 모두 건조한 기후와 국지성 강풍, 산림과 주거지가 맞물린 산림·도시 접경지대(WUI·Wildland Urban Interface)라는 공통된 위험 구조를 안고 있다. 강원 동해안 산불이 양간지풍을 타고 산림에서 해안 도시와 마을로 확산돼 왔다면, LA 일대 산불은 샌타애나 바람을 타고 산악 지형과 맞닿은 주택가를 덮쳤다.
기후위기로 산불의 계절성과 규모가 달라지면서 대형 산불 대응은 더 이상 진화 장비와 출동 인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산불이 생활권으로 번지는 속도, 위험 정보를 주민에게 전달하는 체계, 대피와 구조 과정에서 작동하는 지역사회의 대응력 등이 피해 규모를 가르는 핵심 변수가 되고 있다. 본보는 캘리포니아를 찾아 강원 동해안 산불 대응에 필요한 과제를 짚었다.

■ “소방관만으로는 부족”…패서디나의 생활권 방재=산악 지형과 주거지가 매우 가깝게 붙어 있는 도시 패서디나(Pasadena). LA 도심 인근에 위치한 이곳은 주민들이 사는 마을 뒷편으로 이어진 산이 화재 발생 시 불길이 곧장 주택가를 위협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이곳 주민들에게 산불은 뉴스 속 재난이 아니라, 언제든 자신의 집 앞까지 내려올 수 있는 현실적인 공포다.
이곳에서 만난 채드 어거스틴(Chad Augustin) 패서디나 34번 소방국장은 대형 산불의 핵심 대응 과제로 ‘공동체’를 꼽았다. 대형 산불은 한 번 발생하면 불길이 여러 방향으로 번지고, 도로와 주택, 주민 대피가 동시에 얽히는 복합 재난으로 확대된다. 이 과정에서 소방당국의 진화 역량만으로는 모든 위험 지점을 동시에 통제하기 어렵다.
이들이 강조하는 공동체 대응은 평상시 생활권 관리에서 출발한다. 패서디나에는 산불 고위험 주택이 약 4,600채에 달한다. 소방당국은 이들 주택을 대상으로 지붕 위 낙엽과 마당의 나뭇가지, 주택 주변 가연물 관리 상태를 점검한다. 산불이 발생했을 때 불길이 곧장 주택으로 옮겨붙지 않도록 사전에 연료를 줄이는 작업이다.

■ 주민들이 곧 대응망… 조건 중심 대응으로=위험 기상이 예보되면 대응은 곧바로 주민 생활 속으로 들어간다. 캘리포니아는 고온과 저습도, 강풍 등 산불 위험 조건이 겹치는 날 ‘레드 플래그 데이’ 대응이 가동된다. 이때 주요 도로의 주차가 제한되고 소방차 진입로 확보가 우선된다. 산불 발생 시 도로를 막고 있는 차량이나 장애물보다 인명 구조와 진화 차량의 접근이 우선된다. 불길이 주택가로 번지는 순간, 몇 분의 지연이 대피와 진화의 성패를 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에게는 차량 이동, 집 주변 정리, 가족 연락망 확인, 대피 준비 등이 전달된다.
정보 전달 방식도 하나에 의존하지 않는다. 패서디나시 소방국은 문자와 앱 알림, 전화, 방송 등을 함께 활용해 주민들에게 위험 상황을 알린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층에게는 유선전화와 직접 방문도 병행한다. 재난 상황에서는 단순히 경보를 빨리 보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같은 지역 주민들이 같은 위험을 같은 수준으로 인식하고,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산불이 실제 발생하면 대응은 행정 경계를 넘어선다. 패서디나시 소방국뿐 아니라 LA시 소방서, LA카운티 소방국, 로스앤젤레스 국유림, 기상청, CAL FIRE 등 인접 기관이 동시에 움직인다. 산불은 행정구역을 가리지 않고 번지는 만큼 진화 체계도 도시 단위에 머물 수 없다. 초기 신고와 출동, 도로 통제, 주민 대피, 진화 인력 투입이 하나의 현장에서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어거스틴 국장이 가장 강조한 것은 기관 간 협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대형 산불의 최전선은 산림에만 있지 않다. 불길이 주택가로 내려오는 순간 골목과 대피로, 주민의 집 앞 등이 모두 대응 현장이 된다. 소방관이 모든 집을 일일이 확인하고 모든 주민의 이동을 직접 챙기기에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 때문에 패서디나시는 마을 단위 대응을 산불 방재 체계의 한 축으로 보고 있다.
이는 주민 교육을 통해 구체화된다. 패서디나시는 미국 전역에서 운영되는 지역사회 긴급대응훈련(CERT·Community Emergency Response Team) 체계를 활용하고 있다. 21시간 과정으로 구성된 CERT 교육은 재난 발생 시 주민들이 스스로 대피하고 이웃을 확인하며 응급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 훈련이다. 여기에 패서디나시는 자체적으로 4시간짜리 단축 교육도 추가 운영하고 있다.

■ 산불 위험, 더 이상 특정 계절에 머물지 않아=어거스틴 국장은 “과거에는 산불 위험이 높은 시기를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사실상 연중 대응 체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고온과 저습도, 강풍이 겹치는 날이면 계절과 관계없이 산불 위험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패서디나시는 ‘산불 시즌’이라는 고정된 기간보다 기상 조건에 따라 위험 단계를 조정하는 방식에 무게를 두고 있다.
어거스틴 국장은 강원 동해안과 같은 산불 취약 지역에도 같은 조언을 남겼다. 대형 산불이 발생하면 어느 나라, 어느 도시든 소방 인력만으로 모든 현장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큰 산불이 나면 소방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주민들이 스스로를 지키고, 이웃을 돕고, 필요한 정보를 소방당국에 전달할 수 있도록 평소 훈련돼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획기사는 2026년 강원특별자치도 지역언론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한 것입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이동수기자 messi@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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