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급망에 갇힌 AI 시대…‘팍스 실리카’로 탈출구 찾을까

박현 기자 2026. 6. 10.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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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 AI 시대 경제블록 구상
지난달 18일 필리핀 루손섬 뉴클라크시에서 제이컵 헬버그 미국 국무부 경제담당 차관(왼쪽 셋째) 등 미국과 필리핀 정부 및 기업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팍스 실리카 부지’ 표지판 제막 행사가 열리고 있다. 필리핀통신(PNA)이 엑스(X) 계정에 올린 사진 갈무리

지난달 18일 필리핀 루손섬 뉴클라크시에서는 ‘팍스 실리카 부지’ 표지판 제막 행사가 열렸다. 미국 쪽에서는 제이컵 헬버그 국무부 경제담당 차관을 대표로 정부 관계자와 12개 미국 기업 인사들이 참석했다. 두 나라는 올해 4월 루손 경제회랑 내 16.2㎢(490만평) 규모 부지에 ‘경제안보구역’(ESZ)을 조성해, 핵심 광물과 반도체 등 인공지능(AI)에 필수적인 원자재와 부품을 생산하기로 합의했다. 필리핀은 이 부지를 2년간 무상 제공하고, 미국은 최대 99년까지 사용 기간을 갱신할 수 있다. 필리핀은 세계 최대 수준의 니켈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구리·크롬철·코발트 등도 풍부하다. 미국 기업들은 이 특구에 입주해 인공지능 기술 공급망을 구축하려 한다.

지금까지 미국이 반도체와 인공지능 칩 수출 통제, 고율 관세 부과 등을 통해 중국을 견제해왔다면, 이 산업 허브는 한발 더 나간다. 동맹국 영토에 직접 첨단산업 벨트를 조성해 미국 주도 공급망 체계 안으로 편입시키겠다는 구상이다. 그런 점에서 루손 경제안보구역 설립 협정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새로운 실험이라 할 수 있다. 헬버그 차관은 행사에서 “핵심 투입재의 90%를 한 나라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공급망이 아니라 ‘인질망’”이라며 이 산업 허브의 핵심 기능이 중국으로부터의 공급망 탈피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 부지는 냉전 시기 대중국 전진기지였던 미 클라크 공군기지 터다. 서쪽으로는 남중국해, 북쪽으로는 대만을 마주하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다. 1991년 필리핀에 반환된 뒤 35년 만에, 인공지능 시대 미국 주도 경제 블록의 전초기지로 되돌아온 셈이다. 미국은 이 구역에 입주하는 자국 기업에 대해 외교적 면책 특권을 부여하고 미국 법률을 적용해달라고 요구했지만 필리핀 정부가 이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동맹국 영토의 대규모 부지를 무상으로 장기간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미국으로서는 상당한 특혜를 얻은 셈이다.

팍스 실리카의 야심

루손 경제안보구역은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팍스 실리카’를 상징하는 첫 프로젝트다. ‘팍스 실리카’는 평화를 뜻하는 라틴어 ‘팍스’와 반도체 소재인 ‘실리카’를 합친 말로, 과거 ‘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주도 질서 아래의 평화)처럼 실리콘 기반 기술이 이끄는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국제 경제질서를 구축하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다. 이 구상은 인공지능 경제 구현에 핵심적인 기술 공급망 전반에서, 파트너 국가들 간 경제안보 협의체를 꾸려 협력을 강화하자는 제안이다. 전통 제조업과 재생에너지 영역에선 중국의 지배력을 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인공지능 공급망을 장악함으로써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속셈이 깔려 있다. 헬버그 차관은 당시 연설에서 “20세기가 석유와 철강으로 움직였다면, 21세기는 컴퓨팅과 이를 떠받치는 광물로 움직인다”며 “이번 역사적 선언은 에너지와 핵심 광물에서부터 첨단 제조와 인공지능 모델에 이르기까지, 뜻을 같이하는 파트너 국가들이 미래의 인공지능 생태계를 함께 구축하도록 보장하는 새로운 경제안보 합의”라고 강조했다. 팔란티어 출신인 헬버그 차관은 이 구상의 설계자로 알려져 있다.

팍스 실리카는 출범 당시 미국 주도로 한국·싱가포르·영국·이스라엘·일본·오스트레일리아(호주) 등 7개국이 참여했고, 이후 그리스·노르웨이·스웨덴·아랍에미리트·인도·핀란드·필리핀·카타르 등이 합류해 현재는 15개국으로 확대됐다. 대만은 비서명 파트너로 참여한다. 유럽연합(EU)은 유럽의 기술 규제 자율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로 참여를 미뤄왔지만, 최근 독일 등에서 참여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기류가 바뀌고 있다. 미국은 다국적 컨소시엄을 구성해 1조달러 규모 투자를 추진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컨소시엄에는 일본 소프트뱅크와 싱가포르 테마섹이 창립 멤버로 참여하고, 일부 국부펀드도 자금을 댈 예정이다. 다만 이처럼 막대한 자금을 계획대로 조달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참여국 면면을 보면 각 분야에서 상당한 역량을 갖춘 나라들이 포진해 있다. 한국·일본은 반도체 제조, 이스라엘·영국은 반도체 칩 설계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핵심 광물, 인도는 풍부한 공학 인재 풀로 주목받는다.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핵심 물류·금융 허브이자 다수 미국 기술기업의 아시아 거점 역할을 한다. 아랍에미리트·카타르는 에너지 공급과 국부펀드 자금을 제공할 수 있고, 스웨덴은 5세대(5G) 통신장비 제조 역량을 갖추고 있다. 이들 국가 간 공조가 원활히 이뤄지면, 각자의 비교우위를 서로 엮어 상당한 시너지를 창출하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정권 따라 바뀌는 미국의 구상

그러나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협의체가 실질적 성과를 내려면 무엇보다 지속성과 국가 간 신뢰가 담보돼야 한다. 미국은 2010년대 초반부터 대중 견제를 목표로 각종 경제·안보 협의체를 잇달아 만들어왔다.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추진하던 틀을 접고 또 다른 구상을 내놓는 일이 반복됐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는 인도·태평양 12개국 시장을 하나의 자유무역지대로 통합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추진했다. 중국의 국가 주도 경제 시스템을 미국식 규범과 기준에 맞게 바꾸려는 야심 찬 기획이었다. 미국은 수년간 공을 들여 회원국들을 모아 어렵게 합의 틀을 구축했지만,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출범하자 스스로 협정을 탈퇴해버렸다. 뒤이은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인도·태평양 14개국이 참여한 경제협력체인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출범시켰지만, 지금은 그 존재감조차 찾아보기 힘든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이 근본적으로 다자 협의체보다는 양자 협상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트럼프식 보호무역이 뚜렷한 성과를 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10여년이 흐르는 사이 중국의 글로벌 공급망 통제력과 첨단 기술력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중국은 미국의 관세 공세에 희토류 수출 통제로 맞불을 놓았고, 미국의 반도체 수출 통제에는 ‘반도체 자립’ 전략을 내세워 정면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헬버그 차관은 최근 싱가포르 스트레이츠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팍스 실리카) 전략은 공급망을 수직적으로 통합된 방식으로 바라보고, 그 모든 노드가 미국 내에 있거나 우리가 의도적으로 협력하기로 한 파트너 국가에 위치하도록 하는 것”이라며 “앞으로 10년간 성장 스토리는 인공지능 공급망을 통해 전개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3년 뒤 정권이 교체될 경우 이 전략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미국의 신뢰 회복이 관건

미국에 대한 동맹·우방국의 신뢰도 이미 크게 훼손된 상태다. 전임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지원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제정해 막대한 보조금을 약속하며 동맹국 기업들의 미국 투자를 독려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보조금 규모가 축소되거나 폐지되면서 정책 기조는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지난해 9월에는 미국 쪽 요구로 조지아주에 배터리 공장을 짓던 현대차·엘지에너지솔루션 협력사 노동자 300여명이 현지에서 체포·구금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미국은 또 고율 보복 관세를 일방적으로 부과한 뒤 이를 낮춰주는 조건으로 수천억달러 규모 투자를 압박하거나, 자국 에너지·농산물 수입 확대를 요구하는 등 ‘약탈적 제국’이라는 비판이 나올 만큼 거친 행보를 보였다. 유럽연합이 팍스 실리카 참여에 그동안 미온적이었던 것도 이런 불신과 무관하지 않다. 한번 무너진 신뢰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 만큼, 팍스 실리카가 실질적인 추진 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 지오테크센터의 트리샤 레이 부국장은 미국은 중국의 강압적 의존도를 낮추는 동시에 회원국과의 신뢰를 구축해야 하는 난제를 안고 있다면서, “신뢰는 파트너십을 전제로 하며, 회원국들이 진정으로 이 연합에 편입되려면 향후 3년을 넘어서는 가치를 이 틀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 변수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은 인공지능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수직 통합하려는 원대한 구상을 내놓았지만, 동맹·우방국과 그 기업들은 중국의 반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전통 제조업은 물론 핵심 광물, 전기차, 재생에너지 분야 글로벌 공급망을 장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수 국가의 최대 교역 상대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중국의 강압을 명분 삼아 미국이 또 다른 형태의 강압을 행사하는 방식으로는 이 구상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미국은 여전히 원천 기술과 자본력을 쥐고 있고, 동맹·우방국의 인력과 제조 역량을 결합하면 상당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그러나 정작 트럼프식 구호와 예측 불가능한 정책이 그 잠재력의 실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박현 논설위원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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