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조각의 땅이라도 버릴 수 없다"… '대한의 영토' 독도를 가다

조선을 둘러싼 세계 열강의 야욕이 노골화되던 1881년 5월 고종은 무관 이규원을 울릉도검찰사로 임명해 일본인의 울릉도 불법 점거에 대응하도록 했다. 이듬해 4월 10일 서울을 떠나 보름간 울릉도를 시찰한 이규원은 6월 5일 창덕궁에 당도해 고종에게 결과를 보고한다.(이하 이규원 '울도산해록' 인용)
이규원 : 저들(일본인)은 교활하고 거짓된 무리여서 (울릉도에 무단으로) 표목을 세워 (울릉도를) '(대일본국) 송도'라고 쓰기에 이르렀는데, 1차로 화방의질(일본 공사)에 공한(公翰)을 보내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일본 외무성에도 서한을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종 : 지금 보니 일시라도 버려둘 수 없다. 비록 한 조각의 땅이라도 버릴 수는 없다.
이규원 : 이번 전교를 가지고 총리대신과 현임대신들에게 낱낱이 전하여 알리겠습니다. 비록 한 자 한 치의 땅이라도 곧 조종의 강토이니, 어찌 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영토주권을 명확히 하려는 고종의 의지는 1883년 '울릉도 개척령'으로 이어졌고, 일본 정부 또한 자국민의 울릉도 도항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일본인의 불법 벌채가 계속되자 1900년 고종은 칙령 41호를 공포해 울릉도 도감을 군수로 격상시키고 독도 역시 울릉군수 관할에 뒀다.
일본이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 1월 독도를 '무주지(주인 없는 땅)'라고 주장하며 한반도 침탈의 첫 희생물로 삼기 불과 5년 전 상황이다. 역사상 언제나 울릉도의 부속섬이던 독도는 이때를 기점으로 '분쟁지역'이란 오명을 뒤집어썼고 오늘날까지 당치 않은 영유권 시비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에 맞설 증거는 차고 넘친다. 조상들은 일찍이 독도를 우리 땅으로 인식하고 주권국으로서 지위를 섬에 아로새겼다. 이달 4일부터 3박 4일간 진행된 동북아역사재단의 울릉도·독도 답사에서 확인한 이규원 검찰사의 발자취를 따라 독도의 모습을 시대순으로 재구성해 봤다.
역사에 '우산국' 등장하다: 우산국박물관, 독도박물관


독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지' 위지동이전 옥저조에서 찾을 수 있다. 서기 245년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며 지방 수령인 왕기에게 고구려 동천왕을 추격하도록 했는데, 명에 따라 동해 근처까지 내려간 왕기가 현지 노인과 나눈 대화에 '우산국'이 등장한다.
이후 '지증왕 13년(512) 신라 장군 이사부에 의해 우산국이 정벌됐다'는 '삼국사기' 기록으로 우산국은 우리 역사에 분명하게 편입된다. 이후 우산국은 한반도 지배세력과 군신관계를 유지하다가 외세의 잦은 침략으로 세가 기울면서 고려의 부속도서로 편입됐다.
학계에선 우산국에 대한 기록은 곧 독도에 대한 기록으로 본다. 물론 우산국 자체는 울릉도를 가리키는 지명이지만 독도는 일찍부터 울릉도의 일부로서 함께 인식됐기 때문이다. '세종실록 지리지'(1454)는 '무릉(울릉도)과 우산(독도)은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며 지명을 혼용해 기록할 정도였다.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외교적으로 확인하다: 안용복기념관, 독도박물관


역사적으로 울릉도는 왜구의 잦은 침범 탓에 사람이 살기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이에 조선은 일찍이 울릉도 거주민을 본토로 이주시키는 쇄환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던 1693년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일본인 불법 어로활동에 항의하다 일본으로 납치되면서 영유권 문제가 떠올랐다.
3년 뒤인 1696년 안용복이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같은 사안을 문제 삼자, 에도 막부는 울릉도·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공식 확인하고 자국민에게 도해금지령을 내렸다. 이 기조는 근대까지 유지돼, 1877년 메이지 정부의 태정관이 내린 지령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고 명시했다.
영토 수호 의지를 땅에 새기다: 각석문, 수토역사전시관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도서관리 정책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낀 조선은 울릉도에 정기적으로 관리를 파견해 지세, 주민 현황, 토산물 등을 파악하게 하는 수토(搜討)제도를 1694년 도입한다. 수토관은 100명에 달하는 수행 인원과 함께 짧게는 2일, 길게는 17일 동안 울릉도를 둘러봤다.
임무를 마친 수토관들은 수토지도를 작성해 보고했는데 이 중에서 6점이 실물로 전해진다. 울릉도 암벽에 수토관 일행의 인명과 수토 기간 등을 새긴 각석문도 6개소에서 확인됐다. 다만 각석문은 수토지도와 달리 반드시 남겨야 했던 것은 아닌 걸로 파악된다.
이런 가운데 태하리 암벽에 30m 정도 이어 새겨진 수토사 각석문에서 최근 다수의 글자가 새로 판독돼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4월 종합학술조사를 진행, 울릉도 각석문 탁본을 제작하고 수토지도를 토대로 현재의 지명과 위치 등을 비교하는 수확을 거뒀다.
일제가 한반도를 침탈하다: 망루 및 해저케이블 육양 유적지



수토제는 이규원 검찰사 파견 등을 계기로 1885년 고종이 울릉도에 전임 도장(島長)을 두기로 하면서 약 200년 만에 폐지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이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러시아를 상대로 1904년 2월 전쟁을 일으키면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의 군사 거점으로 전락하게 된다.
울릉도에 남은 일본 군사기지화 흔적은 지금의 대풍감전망대, 독도전망대, 석포전망대 위치에 차례대로 설치된 서망루, 남망루(이상 1904), 북망루(1905)의 터가 대표적이다. 일본이 1904년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위해 본토인 마쓰에(松江)와 강원 원산을 잇는 케이블을 울릉도에 육양(물속에 잠겨 있는 것을 뭍으로 건져 올림)한 자리에는 표지석이 세워졌다.
민간의 힘으로 독도를 지키다: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

1945년 광복으로 한반도는 온전히 우리 품으로 돌아왔지만, 일본은 6·25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팻말을 설치하고 불법적인 독도 침입을 계속했다. 이에 1952년 울릉도 주민들은 재향군인회를 결성해 독도 수호의 뜻을 다졌고 이듬해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의용수비대는 활동 기간과 규모에 다소간 이견이 있으나, 현행 관련 법령은 대원 33명이 1953년 4월 20일 독도에 상륙했고 1956년 12월 30일 해산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위장용인 '나무 대포'를 활용해 일본의 침탈을 막은 공로 등으로 국가 훈포장을 받았다.
반갑다 우리 땅 독도야: 영토표지석, 독도 등대





동북아역사재단 취재진이 독도 동도에 도착한 건 5일 오전 10시 45분. 울릉도 사동항에서 행정선을 타고 2시간가량 이동하자 새파란 수평선 끝에서 서도의 검은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국 각지에서 온 50여 명의 방문객을 김용헌 경북경찰청 독도경비대장과 수호견 대한이가 맞이했다.
3월 마지막 ‘독도 주민’ 김신열씨가 88세 일기로 별세하며 군·경·소방 관계자 30여 명만 머물고 있는 독도의 첫인상은 '광활함'이었다. 면적은 서도와 동도를 합쳐 16만2,037㎡밖에 되지 않지만, 사방으로 펼쳐진 동해바다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장엄하게 느껴졌다.
감탄도 잠시. 행정선 운항 원칙상 취재진에게 주어진 시간은 1시간에 불과해 잰걸음을 옮겨야 했다. 우는 소리가 꼭 고양이 같다고 해서 이름에 '괭이'가 붙은 괭이갈매기 1만여 마리가 사람을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이 주변을 계속 맴도는 탓에 배설물을 맞지 않으려 애쓰는 소동도 벌어졌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둥그런 영토 표지석. '대한민국 동쪽 땅끝'이라는 각인이 새삼 현재 위치를 실감케 했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망양대에 오르자 '독립문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엔 경북도가 2012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에게 건의해 설치한 또 다른 표지석도 설치돼 있다.
20여 명의 대원이 거주하고 있는 독도경비대 숙소는 동도 정상부에 있다. 김용헌 대장은 전국에서 답지하는 학생 위문편지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한편으로는 숙소 앞에 설치됐지만 괭이갈매기 배설물 탓에 제 기능을 못하는 태양광 시설 등 독도 생활의 현실도 가감 없이 전했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독도의용수비대가 1954년 6월 새긴 것으로 알려진 한국령 암각문 관찰을 끝으로 취재진은 다시 배에 올랐다. '3대가 덕을 쌓아야 갈 수 있다'는 독도를 무사히 다녀왔다는 안도감과 영토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각계각층의 고군분투에 뭉클해졌지만, 이어진 울릉도 여정에선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독도 관련 주요 유적지들이 방치 수준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뼈아픈 침략 역사를 안고 있는 석포전망대(북망루 터)는 제초가 전혀 돼 있지 않아 수풀을 헤치며 걸어야 했고, 정자와 데크는 군데군데 못이 튀어나오고 부서져 있었다. 일본 해저케이블 육양지도 접근이 어려웠다.
태하리 각석문을 쉽게 관찰할 수 있도록 암벽 바로 밑에 설치된 데크 역시 오히려 각석문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상태다. 앞서 2일 열린 재단 학술조사 보고회에서도 고광의 수석연구위원은 데크 밑에도 각석문이 있을 수 있다며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홍성근 재단 독도실장은 "울릉도의 역사 유적은 지역 문화유산을 넘어 독도 영토 주권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며 "일본이 독도에 대한 부당한 영유권 주장을 지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체계적인 관리·정비 정책을 마련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글 사진 울릉도·독도=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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