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당 국민소득 133달러 시절의 감격… 한국 복싱 첫 세계 챔피언 김기수
1997년 6월 10일 58세

1966년 6월 25일 27세 복서 김기수(1939~1997)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주니어 미들급 세계 타이틀에 도전했다. 상대는 챔피언인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 64전 전승을 기록 중인 이 체급 최강자였다. 김기수도 프로 데뷔 후 34승 2무로 무패 행진 중이었다.
둘은 과거 대전한 적이 있었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복싱 경기 16강전에서 만났다. 김기수가 판정패했다. 아마추어 88전 중 유일한 패배였다.
김기수는 열세라는 당초 예상을 깨고 15회 판정승을 거뒀다. 6년 만의 설욕이었다. 이튿날 신문은 1면 기사, 2면 사설, 7면 경기 상보, 8면 ‘챔피언이 되기까지’ 스토리 등 4개 면에 걸쳐 한국 복싱 최초 세계 챔피언의 탄생을 감격스럽게 전했다.


“노란 가운을 입은 김기수의 두 손이 번쩍 올랐다. 장충체육관을 메운 8천여 관중의 손도 함께 올랐다. 한여름 밤의 경기장은 환호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천장에 매달린 시계가 10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국 권투가 세계의 정상에 오른 순간 억수같이 퍼붓던 여름비가 잠시 그쳤다. 홍코너에 주저앉은 전 챔피언 니노 벤베누티는 힘없이 손을 가로저었다. 장내는 또 한 번 터지는 박수로 뒤범벅이 되었다. 링 위에서 김기수의 몸이 몇 번 솟구쳤다. 얼굴이 퉁퉁 부은 김기수는 울고 있었다. 귀빈석에 앉아 처음부터 경기를 보던 박정희 대통령의 얼굴도 함박웃음이었다. 카메라 플래시의 장막을 뚫고 김기수는 귀빈석으로 뛰어 올라갔다. 대통령은 땀에 젖은 김기수를 얼싸안았다. 챔피언의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눈도 뜨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김기수의 허리에 금빛 챔피언 벨트를 감아주었다.”(1966년 6월 26일 자 7면)

유럽의 세계 챔피언을 서울로 불러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챔피언에게 5만5000달러 대전료를 지불해야 했다. 1966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33달러. 아프리카 가나(263달러)의 절반 수준이었다. 정부가 나서 보증을 해야 했다. 김기수는 훗날 조선일보 시리즈 ‘잊을 수 없는 순간들’에서 당시를 회고했다.
“벤베누티 측과 협의 끝에 최종 5만5천달러로 낙착됐다. 그러나 문제는 심각해져 갔다. 매니저 장기섭씨, 프로모터 유종배씨 등 우리 진영은 대전 계약만 해 놓으면 어떻게 되겠지 하고 막연한 기대를 했으나 타이틀전 1개월을 앞두고도 묘안이 나타나지 않았다. ‘시합은 유산되고 망신만 당하는구나….’ 모두가 가슴을 태우고 있었다. 매스컴도 동정을 아끼지 않았다. 중년 신사가 우리 진영을 찾아왔다. 타이틀전을 성사시키는 데 부족한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지금에야 밝히지만 그 신사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보낸 사람이었다. 나는 대한중석에 취직까지 됐다. 박태준 사장은 미국의 리처드 보비씨를 데려다 트레이너를 맡게 하는 호의까지 베풀어 주었다.”(1981년 1월 20일 자 8면)

김기수는 두 차례 방어전에 성공했으나 3차 방어전에서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내줘야 했다. 이탈리아 산드로 마징기와 밀라노에서 열린 원정경기서 15회 판정패했다.
“세계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김기수는 26일 산시로 축구경기장에서 있은 타이틀 방어전에서 도전자 산드로 마징기에게 판정패 당해, 선수권을 빼앗겼다. 이로써 66년 서울에서 니노 벤베누티로부터 타이틀을 빼앗은 김은 1년 11개월 만에 세계 왕좌에서 물러섰다. “산드로” “산드로”를 외치는 3만여 관중의 함성 속에서 김은 1회에 마징기의 오른쪽 눈언저리를, 2회엔 왼쪽 눈썹을 찢는 기습 공격을 퍼부었으나 3회 들어 마징기의 좌우 스트레이트를 맞아 다운, 카운트 8에 일어나 위기를 모면했지만 이것이 판정패의 원인이 됐다.”(1968년 5월 28일 자 8면)

프로 데뷔 후 첫 패배였다. 김기수는 이후 경기에서 또 패했다. 세계 챔피언 타이틀은 빼앗겼지만 동양 챔피언 타이틀은 갖고 있었다. 여섯 달 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5차 방어전에서 미나미 히사오에게 판정패했다.
그대로 주저앉지는 않았다. 석 달 후 3·1절에 열린 리턴 매치에서 미나미 히사오에게 판정승, 챔피언 벨트를 되찾았다.
“1일 밤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타이틀 매치 12회전에서 김기수는 종전같이 예리하지는 못했으나, 그런 대로 라이트를 잘 살려 챔피언인 일본의 미나미 히사오(25)를 제압,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어 한국인으로는 처음 두 번째 타이틀을 되찾은 복서가 되었다. 6천여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밤 9시 25분에 시작된 경기에서 김기수는 키가 크고 리치가 긴 미나미에게 고전, 몹시 땀을 흘렸는데 초반과 종반에서 원투와 훅의 콤비네이션을 잘 구사, 우세한 경기를 벌여 꼭1백일만에 설욕한 것이다.”(1969년 3월 2일 자 7면)

김기수는 다섯 달 후 기자 회견을 열어 은퇴를 선언하고 동양 챔피언 벨트를 반납했다.
“너무 오래 타이틀을 지키고 있다 보니 국내 선수들이 찬스를 못 얻어 빛을 내지 못하고 거기에 허리도 다쳐 현역에서 물러서기로 결심했다.” 주먹의 왕자 김기수는 침통한 얼굴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 “문화방송 TV의 개국 기념 경기를 위해 정릉 산골짜기에서 해머 연습을 하다 척추를 다쳤는데 나이를 잊고 너무 무리한 트레이닝을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보람찼던 나의 선수 생활이 이때문에 종말을 맺게 되리라고는 의외였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눈엔 약간 이슬이 맺히는 듯 보였다. 아마 생활 6년, 프로 생활 7년 동안에 아시아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프로에서는 한국 미들급 챔피언, 동양 미들급 챔피언, 세계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등 차례로 정상을 정복한 그를 평하여 ①해방 후 최초의 동양 챔피언 ②한국 복싱 사상 처음의 세계 챔피언 ③그리고 최초의 동양 타이틀 자진 반납자라고 프로 복싱계는 칭찬했다.”(1969년 8월 6일 자 3면)
은퇴 후 사업에 수완을 발휘했다. 명동에 다방을 열고 제주도에서 백화점을 경영했다. 1997년 6월 10일 간암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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