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당 잡아야만 돈 내주는 은행, 이러니 전당포 수준”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사장단 회의록 최초 공개
앞으로 크게 성장할 분야, 보험·증권·금융뿐
해외서 공사하듯 보험도 그럴 진대…왜 외국 회사만 키워주나

1980년대의 한국 금융업은 관치금융 시기였다. 정주영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투자와 자금 조달은 기업과 금융기관의 자율에 맡겨야 마땅하다고 봤다. 비판에 그치지 않고 직접 금융업에 뛰어들었던 이유다. 법률신문이 단독 입수해 공개하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사장단 회의록〉에는 금융 자율화를 지향했던 정 회장의 집념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1984년 10월 15일 현대그룹 사장단 회의. 정주영 회장이 정부의 대기업 여신 규제를 공개 비판했다. 현대를 비롯한 한국 기업이 미국, 일본 기업과 세계 시장에서 겨룰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 회장: 한국은행 총재가 "5대 그룹 중 하나가 파산하면 우리나라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느 한 그룹만 여신을 관리할 수가 없고, 전부 함께 관리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주시오" 그렇게 얘기했단 말이에요. 정부가 5대 그룹을 획일적으로 묶는 건, 발전 현상이 너무 집중되니까 그렇다는 것인데, 아주 틀린 생각이에요.
이어진 보고에서 "정부와 은행의 실무진과 접촉해 보니 대기업으로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여신 규제가 불가피하다고 한다"는 말이 나왔다. 비판 수위가 높아졌다.
정 회장: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예요. 우리나라 30대 그룹의 연간 이익을 전부 합해도 일본의 대기업 하나, 미국 대기업 하나의 이익만도 못해요. 그걸 가지고 무슨 30대 그룹이 더 이상 크면 안 된다고 하고. 도대체가 상식 이하의 사람들이 상식 이하의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선진화한다, 일류 국가가 된다고 말만 하면서 말이죠. 조그만 구멍가게는 자기 돈으로 크지만, 큰 기업은 공신력을 가지고 큽니다. 원동력을 상실시키고 도대체 어떻게 크라고 하는 거예요. 큰 기업이 오늘날 세계 공신력 가지고 컸지, 돈을 벌어가지고 컸나? 구멍가게에서나 그렇게 하는 거죠. 발전을 누른다고 균형이 되는 게 아닌데 착각하고 있어요.
단순한 비판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낙후된 업계를 바꿀 목적으로 실제로 금융업에 진출했다. 그 중심에 동방화재(현 현대해상), 국제종합금융(1999년 강원은행에 합병), 국일증권(현 KB증권)이 있었다.
정 회장: 동방화재, 국제종금, 국일증권은 자본을 증자한다든지 활동 영역을 넓히기만 해도 굉장히 발전할 수 있어요. 무슨 획기적인 계획이 하나 나왔으면 좋겠어요. 동방화재도 지혜를 좀 짜서, 현대그룹 내에서 맡을 수 있는 건 의논해서 위험률을 낮춰서 평가를 해야 돼요. 위험률이 낮은 건 외부로 나가는 걸 절반으로 줄이면 이익이 훨씬 커질 수 있어요. 영업 활동 영역을 넓히는 것도 좋고요. 동경지점에 좀 더 진취적인 사람을 보내서 매출을 몇십 배로 늘려보자는 거예요. 우리가 일본에서 거래를 많이 하니까요. 내가 직접 나서서라도 일본 일류기업들한테 현대 산하 보험회사에 보험을 맡기라고 해보자는 거예요. 보험료 못 받을 염려는 없다고 하면서. 그렇게 요청하면 안 될 게 없겠죠? 아주 놀랄 정도로 동방화재 매출을 몇백 배로 키워봅시다. 의욕적으로 가야 합니다.
발언이 이어졌다. "앞으로 우리 기업 활동이 크게 성장할 분야는 보험, 금융, 증권밖에 없어요. 이건 제한이 없어요. 노력한 만큼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해외 나가서 공사하듯이 보험도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아주 놀랄 정도로 발전할 수 있고, 그게 곧 한국 경제 발전과 함께 가는 거예요. 왜 일도 안 하는 영국 보험회사만 키워줘요? 쉬운 건 외국에 넘기고 우리는 힘든 해외공사나 가서 일만 할 거예요? 동방화재, 국제종금, 국일증권 책임자들은 5개년 계획을 다시 만들어 갖고 오세요."
정 회장은 은행이 변화하지 않으면 금융업이 후진성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84년 10월 29일 사장단 회의. 정 회장은 국내 은행이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점을 지적했다.
정 회장: (해외 건설과 조선업 불황이 심각한데) 금융시장이나 자본시장은 거의 잠자고 있는 수준이에요. 얼마든지 발전할 여지가 있는데 적극적인 노력도 없이 그저 지켜보기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 경제를 바로 세우려면 시중은행을 민간 경영자에게 완전히 맡기고, 은행 경영자들도 과거의 자세에서 벗어나 은행다운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 은행이 부동산을 일일이 저당 잡고 대출합니까? 우리는 건설, 중공업 두 회사만 해도 일전도 저당 없이 대출받을 수 있는 공신력을 가지고 있어요. 외국 은행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은행은 뭐 합니까? 극단적인 표현을 하자면 아직도 한국의 은행은 꼭 저당을 잡고 돈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부정 대출했다며 국회가 떠들고 사회가 떠드니까 전당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타락한 은행가'도 거론했다. "(한국 경제가 잘되려면) 금융 산업이 건실하게 확대되고, 계속적으로 투자를 해서 산업 전반을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산업계가 부실하다고 말할 수는 있어요. 해외 건설이 부진하다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은행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 곳에 보증을 서느냐는 겁니다. 은행가가 아닌 외부 압력 때문에 보증을 섰다면 그게 잘못이고, 그로 인해 은행이 망할 지경이 되면 그런 은행가는 사표를 내고 나가야 해요. 1,000억 원, 2,000억 원 규모의 손실을 낸 기업에도 정부 지시라고 해서 보증을 서주는 타락한 은행가들이 있습니다. 그게 우리나라 은행의 문제입니다."
정 회장은 그룹 금융 계열사에도 엄정한 잣대를 들이댔다. 1985년 3월 11일 사장단 회의. 국일증권의 부진이 도마 위에 올랐다. 국일증권의 1985년 1~2월 영업 실적이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18% 하락했기 때문이었다.
정 회장: 국일증권이 마이너스인데, 주요 원인이 무엇입니까? 다른 증권회사에 비해 주가도 떨어지고요. 우리가 비전문가를 그 자리에 배치해서 그런 건 아닌지, 그것이 시정 가능한지도 문제입니다. 자본이 적을수록 주가를 유지하기는 더 쉬워야 하는데 말이죠. 종합기획실에서는 국일증권을 심층 분석해 보십시오. 왜 지금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석 달 뒤 정 회장은 다시 금융 계열사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1985년 6월 17일 사장단 회의.
정 회장: 동방화재든 국제종금이든 국일증권이든 큰 계획을 가지고 활기차게 진행해 주었으면 합니다. 국일증권이 너무 침체해 있는데, 모든 증권회사 중에 우리가 제일 침체된 느낌입니다. 동방화재도 국내 제도와 대외 활동 등을 더 보강하세요. 사람, 시설, 연구·개발 요원이 부족하면 보충하세요. 각 회사가 특성에 맞춰 무엇이 부족한지 책임 경영자들이 적극적으로 검토해 보완하세요.
대외 여건이 어려워도 진취성을 갖고 극복해야 한다고도 했다. "아무리 세계 경제나 국내 경제가 어떻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 목표대로 성장하도록 활력을 불어넣으세요. 그저 자리나 지키고, 회사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생각 없이 아무것도 안 하다가 조그만 성과 하나를 내세워 시간만 보내서는 기업이 노쇠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직원이 회사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