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르포] 지갑 얇은 2030은 ‘거지맵’을 켠다, 4000원 국밥집 찾으러

윤성우 기자 2026. 6. 10.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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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렴한 한끼 위해 노년층 상권으로
2026년 6월 9일 서울 종로구의 한 국밥집에 저렴한 가격표가 게시돼 있다. /장경식 기자

지난달 28일 오전 11시 30분 찾은 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한 설렁탕집은 만석(滿席)이었다. 테이블 9개가 다 찼지만 식당 앞에도 15명이 줄을 서 있었다. 식사 순서를 기다리는 15명 중 9명은 20·30대였다. 탑골공원 북문 맞은편에 있는 이 식당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손님 대부분이 노인이었다. 하지만 최근 대학생과 취업 준비생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젊은 손님이 늘었다고 한다. 광화문과 종로 일대 점심값이 1만5000원을 웃도는데, 이 식당에선 7000원에 한 끼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9일 점심때 찾은 서울 종로구 동묘(東廟) 앞의 한 국밥집도 낙원동 설렁탕집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4000원짜리 국밥(65세 이상은 3000원)을 파는 이 식당도 좌석 26개가 모두 차 있었는데 손님 절반이 20·30대였다. 식탁에는 ‘합석이 가능하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70대 노인이 옆자리 20대 청년에게 물통을 건네 달라고 하자, 청년은 자연스럽게 물을 따라줬다. 노인은 청년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말을 건넸고 둘은 국밥을 뜨며 대화를 이어갔다.

탑골공원과 동묘 일대는 ‘노인들의 홍대 거리’로 불렸다. 은퇴한 노인들이 모여 장기를 두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저렴한 식당·이발소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머리를 손보는 공간이었다. 일부 젊은이들은 이른바 ‘혐노(嫌老) 정서’를 유발하는 곳이라며 가기를 꺼렸다. 그러나 최근 들어 고물가 행진이 이어지자 점심값에 부담을 느낀 20·30대가 탑골공원과 동묘를 찾아 노인들과 섞이기 시작했다.

서울시 실시간 도시 데이터에 따르면 9일 낮 12시 기준 탑골공원 일대 실시간 인구 1만3000여명 중 20·30대 비율은 32.6%였다. 3명 중 1명은 청년인 셈이다. 같은 시각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27%)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30.7%)의 청년 인구 비율보다 높았다.

탑골공원 근처에 있는 해장국집 종업원 원모(70)씨는 “두 달 전부터 젊은 손님이 늘더니 이제는 손님 절반 이상이 20·30대”라며 “자리가 부족해 젊은이들이 노인과 한 테이블에 합석한다”고 했다.

탑골공원과 동묘 일대에 20·30대가 몰린 건 스마트폰 앱 ‘거지맵’ 영향이 크다. 한 끼 가격이 7000원 이하인 초저가 식당을 지도 형태로 공유하는 이 앱은 지난 3월 20일 출시된 후 한 달 만에 이용자 130만명을 돌파했다. 거지맵이 인기를 끌자 ‘짠내맵’ ‘거지트립’ ‘보릿고개맵’ ‘한끼족보’ ‘착한가게’ 등 유사 앱이 잇따라 출시됐다. 여기에 노년층 생활권에 자리 잡은 저가 식당들이 노출되면서 한 끼를 최대한 싸게 해결하려는 청년들이 몰려드는 것이다.

특히 종로3가 남측에 밀집한 대형 어학원과 취업·편입 학원에 다니는 청년들이 탑골공원 일대 식당가를 자주 찾고 있다. 남측 학원가와 북측 탑골공원 식당가는 직선거리로 300~500m 남짓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학원에 다니는 청년들은 노인들이 자리 잡은 탑골공원 일대를 피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수년간 고물가 행진이 이어지면서 저렴한 노인 상권을 찾는 청년이 늘어났다.

취업 준비생 고모(26)씨는 “종로에 있는 학원에 다니면서 인근에서 점심을 때워야 하는데 주머니 사정 때문에 편의점에서 간단히 배를 채울 때가 많았다”며 “탑골공원 주변 저가 식당을 알게 돼 돈 걱정을 다소 덜면서 식사를 해결하게 됐다”고 했다.

실제로 종로 3가 거리를 기준으로 남북 간 음식값 차이가 크다. 도로 북쪽 탑골공원 인근 식당가에는 국밥류는 3000원, 칼국수 5000원, 냉면 6000원, 제육정식 5500원에 파는 식당이 있다. 반면 종로 학원가와 종각 젊음의 거리가 있는 도로 남쪽 일대에서는 국밥류가 1만5000원, 칼국수 9000원, 냉면 1만1000원, 제육정식 1만1000원 안팎이다.

서울 지역 ‘런치플레이션(점심값+인플레이션 합성어)’은 수년째 지속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 가격 정보 종합 포털 ‘참가격’에 따르면 서울 지역 주요 외식 메뉴 가격은 1년 새 일제히 올랐다. 김밥은 3624원에서 3800원으로 4.9%, 칼국수는 9679원에서 9990원으로 3.2%, 냉면은 1만2295원에서 1만2557원으로 2.1% 올랐다.

청년들은 ‘어르신 생활권’에 들어서는 것을 낯설어하면서도 겸상(兼床) 경험 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종로에 있는 편입 학원에 다니는 오모(27)씨는 “처음엔 식당에 어르신들만 계셔서 들어갈지 망설였다”면서도 “막상 합석한 할아버지가 ‘인물이 좋다’고 말을 걸어주셔서 정겨웠다”고 했다. 동묘의 한 국밥집 단골 박영식(71)씨는 “처음엔 젊은이들이 왜 오는지 몰랐는데 밥값이 싸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짠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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