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영의 시선] 재선거를 외치는 시민들, 그들이 정말 묻는 것

#2021년 9월 26일 독일 베를린. 민주주의 국가 독일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 펼쳐졌다. 투표소 밖에는 긴 줄이 늘어섰고, 일부 유권자들은 투표용지가 없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연방총선과 주의회 선거가 치러진 이날, 베를린 마라톤과 겹친 도심 교통 통제로 투표용지가 제대로 배달되지 않은 것이다. 일부 투표소에선 엉뚱한 지역의 투표용지가 배부되기도 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수천 건의 이의신청을 제기했고, 결국 독일 헌법재판소는 선거의 평등성과 정당성이 훼손된 중대한 하자로 판단해 선거 무효 및 재선거를 명령했다. 베를린시는 사건을 단순 실수로 덮지 않았다. 독립적인 조사 끝에 선거관리 조직을 전면 개편하고 선거 전담 인력을 대폭 확충했다. 또 투표용지의 인쇄·배포 체계를 재정비하고 비상 대응 매뉴얼도 새로 마련했다. 재선거는 끝이 아니라 제도 개선의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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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투표 감수한 독일 베를린
실패를 교훈으로 남긴 미국
한국도 이제 답 내놓을 차례
」
#2022년 11월 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루전 카운티도 비슷한 혼란을 겪었다. 중간선거 당일 수십 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지면서 투표가 중단됐다. 시민단체가 긴급 소송에 나섰고, 법원은 투표 시간을 2시간 연장했다. 선거 직후 SNS에는 부정선거 음모론이 범람했고, 정치권도 책임 공방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검찰과 당국의 조사 결과 조직적 개입이나 음모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원인은 인력 교체 과정의 인수인계 부실과 수요 예측 실패였다. 루전 카운티는 조사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투표권 침해 소송을 제기한 시민단체 측에 소송비용을 전액 배상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마무리했다. 동시에 투표용지 확보 기준을 강화하고, 직원 교육과 비상 대응 절차를 의무화했다. 실패를 기록으로 남기고 재발 방지 장치로 연결한 것이다.
독일과 미국의 이야기는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지방선거가 치러진 지난 3일, 일부 투표소에선 투표용지가 예상보다 일찍 소진되면서 유권자들은 장시간 대기하거나 투표를 포기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이 외치는 공통의 구호는 ‘재선거’다. 물론 독일과 미국의 사례가 보여주듯, 재선거는 절차적 정당성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됐을 때만 꺼내 드는 최후의 법적 수단이다. 현실적으로 당장 선거 전체를 다시 치르기 어렵다는 점을 시민들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이들이 ‘재선거’라는 구호를 들고나온 이유는 명백하다. 사태가 터진 후 선거관리위원회가 보여준 불투명함과 무책임함이 시민들을 거리로 떠밀었기 때문이다. 유권자 수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인지, 왜 비상 대책은 작동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책임 있는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재선거’라는 구호는 단순한 법적 요구가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벌어졌고, 누가 책임질 것이며, 앞으로 무엇을 바꿀 것인가”를 묻는 주권자의 절박한 질문인 셈이다.
사실 국민적 불신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2022년 대선 당시 코로나19 확진자 투표 과정에서 벌어진 이른바 ‘소쿠리 투표’ 파문은 선거 관리의 기본 원칙을 의심케 했다. 이후 불거진 고위직 자녀 특혜 채용 논란은 선관위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여기에 이번 사태로 드러난 선관위의 안일함은 폭발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사후 조사에서는 잠실과 강남 일부 투표소에서 오전부터 투표용지 부족을 알리는 현장 요청이 이어졌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나 선관위는 이러한 현장의 목소리에 즉각 대응하지 않았고, 결국 투표소가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를 자초했다. 눈앞에 닥친 위기 신호마저 묵살한 선관위의 관료적 나태함이야말로 국민이 분노하는 대목이다.
앞선 독일은 재선거라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감수하면서도 선거의 신뢰를 선택했다. 미국은 음모론이 난무하는 혼란 속에서도 독립적 조사를 통해 시스템의 구멍을 찾아내고 기록했다. 두 나라 모두 시민들의 분노를 제도 개선의 동력으로 바꿨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 민주주의 역시 이제 같은 시험대에 올랐다. 선거 준비와 투표용지 배포, 당일 의사결정 과정까지 투명하게 공개하고 실패의 원인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누구의 책임인지 명확히 가리고,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적 보완책도 마련해야 한다. 예비 투표용지 확보 기준과 현장 비상 대응 체계 역시 전면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에 답하는 자세다. 독일과 미국은 그렇게 했다. 이제 한국도 답을 내놓을 차례다.
박소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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