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적 일방주의 맞설 ‘한국의 카드’는 중견국과 공동대응[2026 경향포럼]
혼돈의 국제정세 속에서 중견국 외교론이 부상하고 있다.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구적 투사 능력을 가진 강대국은 아니지만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선진 중견국들은 강대국들이 세력권 분할을 획책하고 세력균형적 사고로 움직이는 ‘위력의 시대’를 깊이 우려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미국에 대한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이 거의 미국의 동맹국이기 때문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과연 한·미 동맹에 의존해 우리의 안보와 번영을 지켜낼 수 있을까.
도널드 트럼프 2기 출범 후 미국의 강압에 크게 시달린 국가는 중국도 러시아도 아닌 미국의 동맹국이다, 한국, 일본, 나토 회원국은 트럼프 주도 관세전쟁의 최대 피해자로서, 관세 10% 삭감의 대가로 도합 1조5000억달러를 상회하는 대미 투자를 약속했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3.5% 수준의 국방비 증액 청구서를 받았다. 트럼프 정부와 잔혹한 협상을 치르면서 미국의 동맹 의지에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미국의 이란 공격은 중동산 에너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동맹국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중동전쟁이 자국 경제에 직격탄을 날리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서울, 도쿄, 브뤼셀은 사전 협의나 통보도 받지 못했다. 더욱이 이란의 강력한 저항에 흔들리는 미국을 보면서 그 의지뿐 아니라 능력에도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이어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트럼프가 중국에 G2의 한 자리를 허락하면서 동맹체제보다 미·중 협조체제를 우선시한다는 인상을 주자 이들의 전략적 고민은 가중되고 있다.
관건은 대미 과잉 의존에 따른 구조적 취약성을 어떻게 보강할 것인가에 있다. 더 넓게는 규칙 기반 국제질서를 통해 강대국의 횡포나 독재국가의 교란으로부터 안전판을 확보할 수 있었던 한국과 같은 중견국이 미국의 의지와 능력 쇠퇴로 야기되는 질서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갈 것인가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지난 1월 다보스 포럼에서 중견국 ‘연대’를 제안했다. 파탄 상태에 이른 현 국제질서를 재건하기 위해 유사 입장의 중견국들과 결속해 대응하자는 논리다. 캐나다와 유럽 중견국들이 주창하는 중견국 연대론은 미국 의존 축소와 다극화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상당한 호소력을 갖는 주장이지만 그간 우리가 추구해온 중견국 외교와는 결이 다르다. 한국의 중견국 외교는 세계 10위권에 근접한 경제적 위상에 걸맞은 외교를 수행하자는 차원에서 부상했다.
약소국 시절의 대미 추수 외교를 넘어 다자외교, 지역외교 등 외교 다변화를 추구하는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미국 중심 위계질서 속에서 자국 위상의 상승을 꾀한 것이다. 반면, 기성 질서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도를 드러내는 경우 미국의 견제가 작동했다. 과거 노무현 정부 외교는 동맹 의존을 넘어 동북아에서 희망을 찾겠다는 ‘동북아시대’를 내걸고 ‘동북아균형자론’과 ‘협력적 자주국방’을 선언했으나 동맹 의존을 넘는 실질적 대안 부재로 조용히 접었다.
유럽이나 캐나다는 안보 위협국인 러시아에 대해 미국 없이도 집합적으로 군사적 억지력을 확보할 수 있지만, 한국은 미국이 제공하는 확장억제 없이 안보 불안을 해소할 수 없다. 일본도 중·일관계 악화와 북핵 위협 증가로 미·일 동맹 강화가 긴요한 시점이라 중견국 연대에 조심스럽다. 대미 신뢰는 떨어졌으나 동맹의 필요성은 변함없다.
우리에게 중견국 연대외교는 질서 재건보다 강대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디리스킹(리스크 경감)의 수단으로 필수적이다. 미국은 동맹관계를 거래로 간주해 동맹국이 ‘카드’가 없으면 종종 약탈적으로 나온다. 한국은 대미 협상력 확보 카드, 즉 과도한 관세 부과나 직접투자, 무리한 안보 부담 요구에 대해 유사 입장 중견국과 공동대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중국의 경제 강압 시도에 대해서도 유력한 대응카드가 될 수 있다. 나아가 무역, 기술, 투자 등 비안보 분야에서는 개방적 국제질서의 재설계를 위한 중견국 연대를 능동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 요컨대, 중견국 연대외교는 우리에게 국제질서 재건축을 겨냥한 ‘제3의 길’이 될 수는 없지만 강대국 경쟁의 험로를 헤쳐가는 핵심 정책 층위로 재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손열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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