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공감] ‘흥망성쇠 함께한 산증인’ 피재성 여주도자기사업협동조합 이사장
다시 빚는 여주의 내일… “다음 세대도 가마불 타올랐으면”
고령화·후계자 부족·온라인 전환 늦어져 지역 도자산업 생존 위기
공장 폐업의 아픔 딛고 도예기술 배워 재기… 찻잔, 자식같은 작품
연간 100만명 찾는 도자기축제·해외 판로 개척으로 성장동력 모색
K-도자기 경쟁력 충분… 미래 이끌 장기 육성전략·컨트롤타워 필요

도자기는 예술과 산업 사이 어딘가에 있다. 흙을 빚고 불을 다루는 일은 장인의 손끝에서 시작되지만 한편으론 가마를 돌리고 수량과 납기를 맞춰야 하는 생업이기도 하다.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처럼 똑같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낭만만으로 버틸 수 있는 세계도 아니다. 한때 전국 도자기의 절반 이상을 만들던 여주. 공장이 하루에 하나씩 늘어나던 전성기부터 플라스틱 그릇과 수입산 저가 도자기에 밀려 산업이 서서히 위축돼온 지금까지 피재성 여주도자기사업협동조합 이사장은 반세기 넘게 여주 도자산업의 흥망성쇠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나왔다.

어린 시절 그가 기억하는 여주에는 작은 도자기 공장들이 빼곡했다. 도예가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을 만드는 공방과 달리 당시 여주 도자기 산업은 일찍부터 분업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물레 성형사와 화공, 조각사, 가마 기술자들이 역할을 나눠 작업할 정도로 생산 구조가 세분화됐고 여주는 1990년대 전국 최대 규모 도자기 생산지로 성장했다. 공장은 매일같이 늘어났다. 100곳 미만이던 지역 도자기 공장은 한때 600곳을 넘어섰고 전국 도자기의 60% 가까이가 이곳에서 생산됐다. 공장마다 평균 5명 안팎의 기술자들이 일했고 전국의 도소매상들이 직접 여주를 찾아 물건을 사 갈 정도로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여주 도자기 산업은 서서히 방향을 잃기 시작했다. 소비자들은 이전과 다른 디자인과 개성을 원했지만 기존 대량생산 체계에 익숙했던 공장 상당수는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한 일부 업체들은 성공했지만 그렇지 못한 곳들은 점차 경쟁력을 잃었다. 여기에 플라스틱과 일회용품이 식당가를 빠르게 대체했고 중국산을 비롯한 저가 수입 도자기까지 밀려들며 산업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피 이사장은 1993년 아버지에게 공장을 물려받아 운영했지만 불과 1년 만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결국 공장을 접어야 했다. 판매장이 있어 생계는 이어갈 수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실패했다는 좌절감이 남았다.
그동안 도자기 판매와 관리만 맡아왔던 그는 직접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40대를 앞둔 나이에 다시 학생이 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첫 가마를 열었던 순간은 지금도 선명하다. 두 달 가까이 공들여 만든 작품들이었지만 결과물은 기대와 달랐다. 색감도 질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후에도 실패는 반복됐다. 신제품 개발 과정에서는 샘플 제작까지 성공하고도 마지막 소성 단계에서 연이어 실패했다. 한동안은 가마 문을 열었는데 작품이 모두 망가져 있는 악몽을 꿀 정도였다. 그런 시행착오 끝에 지금도 가장 아끼는 작품은 작은 찻잔 하나다. 무너져 내리는 듯한 문양이 특징인 찻잔이다. 공정이 까다롭고 손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라 단가도 높은 편이고 대중적인 상품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에게 그 찻잔은 수많은 실패 끝에 겨우 건져낸 자식 같은 작품이다. 그 작은 찻잔은 어쩌면 지금의 여주 도자산업과도 닮아 있다. 대량으로 팔리는 상품은 아니지만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손맛이 있고 수차례 실패를 견뎌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문제는 그런 시간을 감당할 수 있는 공방과 사람이 점점 줄고 있다는 점이다. 한때 대량생산 체계로 움직이던 여주의 도자기 공장들은 이제 300개 남짓의 소규모 공방 형태로 바뀌었다. 과거 평균 5명 안팎의 기술자들이 일하던 공장은 이제 사장을 포함해 두 명 이하가 버티는 경우가 많다.

여주를 찾는 발길도 뜸해졌다. 과거에는 전국의 도매상들이 직접 여주를 찾아왔지만 지금은 온라인 쇼핑몰과 SNS 중심으로 유통 구조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나 고령인 조합원 상당수는 온라인 판매와 마케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후계자 부족도 심각하다. 현재 업계 종사자 상당수가 50~60대이며 2세 경영에 참여하는 비율은 10% 수준에 머물고 있다. 피 이사장은 “도자기는 문화산업이면서 동시에 제조업인데 수익 구조가 약하다 보니 젊은 세대가 쉽게 뛰어들기 어렵다”며 “주변에서도 우리 대에서 끝날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여주 도자기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지는 않는다. 매년 100만명 안팎이 찾으며 경기도 대표 축제로 자리 잡은 여주도자기축제는 그에게 여전히 산업의 버팀목 같은 존재다. 실제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4~5월 축제 기간 판매량이 한 해 매출 흐름을 좌우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는 축제가 단순 판매 행사를 넘어 여주 도자기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공간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주시가 추진 중인 ‘일회용품 없는 축제’ 역시 도자기를 다시 생활 속 문화로 연결하려는 시도라는 설명이다. 그는 “축제가 단순히 물건을 파는 행사가 아니라 국민들에게 ‘여주 하면 도자기’라는 인식을 남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해외시장 진출도 준비하고 있다. 조합은 경영연구협동조합과 협업해 글로벌 공예품 플랫폼 ‘엣시(Etsy)’ 입점을 추진하고 있으며 오는 10월까지 30여개 품목을 해외 온라인 시장에 선보일 계획이다. 피 이사장은 K-도자기의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본다. 그는 “젊은 도예인들의 창의력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경쟁력이 있다”고 자부심을 내비쳤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산업 전체를 이끌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피 이사장은 “여주에는 여러 기관이 있지만 산업 전체 방향을 조율할 중심은 부족한 상황”이라며 “도자기를 단순 공예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뿌리산업으로 바라보고 장기적인 육성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산업 전체를 이해하고 연결할 수 있는 전문 인력과 체계만 있어도 여주 도자기의 미래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제 여주에는 예전처럼 굴뚝 연기가 가득한 도자기 공장도 전국 도매상들로 붐비던 거리도 점점 사라져 간다. 그럼에도 피 이사장은 오늘도 가마 불을 지핀다. 수십 번 실패해도 다시 흙을 만지고 또 한 번 가마 문을 여는 일. 어쩌면 그것이 반세기 넘게 여주 도자기를 버텨온 사람들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 피재성 여주도자기사업협동조합 이사장은?
▲ 1968년 8월 여주 출생
▲ 1993년 해성요 설립·운영
▲ 2004년 명지대학교 산업대학원 도자기기술학과 졸업
▲ 2009년 문경대학 도자기공예과 졸업
▲ 2018년 남북코리아국제미술전 도예부문 국제예술상
▲ 2024년 여주도자기사업협동조합 이사장 취임
▲ 2024년 제36회 여주도자기축제 자문위원장
▲ 2025년 제37회 여주도자기축제 자문위원장

/김지원 기자 zone@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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