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에 있다. 전국에 잇다] 칠천량해전의 기억

임명진 2026. 6. 9.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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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여 명이 잠든 바다, 임진왜란 해전 중 유일의 패전지
6월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 우리는 이 시기가 되면 6.25전쟁을 떠올리고, 낙동강 방어선의 처절한 사투를 기억하며, 인천상륙작전의 극적인 반전에 감탄한다. 그보다 400여 년 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한산도대첩을 이끌고 명량의 기적을 만들어낸 역사도 함께 되새긴다. 그러나 찬란한 승전의 역사 앞에서 우리는 한 가지 무거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패전의 역사 앞에서도 그만큼 진지한가.
 
칠천량해전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봄 칠천량 바다.


◇역사상 최악의 패전 '칠천량 해전'

거제시 칠천도 앞바다. 우리 역사에서 최악의 패전 중 하나로 기억되는 칠천량해전의 현장이다. 1597년 이 좁은 해역에서 160여 척의 조선 수군이 전멸에 가까운 괴멸적 피해를 입었다. 인근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 벽면에는 '통곡이 터져 나옴을 이길 수 없었다.'는 당시의 절규가 서글픈 문장으로 새겨져 있다.

거제시는 이 패전지를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 관광지로 선정해 2013년 7월 칠천량해전공원을 조성했다. 다크투어리즘이란 재난이나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찾아 반성과 교훈을 얻는 여행을 말한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수용소,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등이 대표적 코스다.
 
칠천량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자리한 칠천량해전공원.


칠천량해전공원은 칠천량해전이 전하는 역사적 배경과 과정, 결과, 그리고 패전 이후 교훈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탄생했다.

1592년(임진년)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 정복을 구실로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부산을 침략했다. 개전 불과 20여 일 만에 수도 한양이 함락되는 사태가 벌어졌으나,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전국 각지의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압도적인 제해권 장악과 명나라의 참전이 더해지면서 전세는 서서히 반전됐다.

이후 조선과 명나라, 일본은 5년간 지루한 강화 협상을 이어갔으나 끝내 결렬됐다. 1597년(정유년), 일본이 다시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정유재란의 비극적인 시작점이 바로 칠천량해전이다.
 
 
 


그런데 칠천량의 비극은 전투 이전에 이미 잉태됐다. 발단은 일본의 치밀한 이간계였다. 정유재란 발발 직전, 조선 조정은 일본의 계략에 빠져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서 파직하고 하옥했다.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 측은 최대 장애물인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이중 첩자 요시라를 조선에 보내 "가토 기요마사가 곧 바다를 건너올 테니 수군을 출동시키면 잡을 수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조선은 이를 그대로 믿고 이순신에게 출동을 명했으나, 이순신은 현장을 살핀 뒤 적의 함정임을 간파하고 출동을 거부했다. 조선은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압송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앉혔다. 적의 계략이 조선 조정을 움직였고, 조선은 스스로 가장 유능한 장수를 전선에서 끌어내린 셈이었다.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 건물 외관이 조선 수군의 판옥선 형상을 담고 있다.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 내부 모습.


◇예견된 패배

후임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은 조선 조정의 거듭되는 부산 공격 강요에 직면하게 된다. 원균은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육군의 동시 지원 없이는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호소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선군 최고사령관인 도원수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까지 맞은 원균은 결국 1597년 음력 7월 12일(양력 8월 24일) 전선 16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에서 부산으로 출전했다.

조선 수군은 음력 7월 14일(양력 8월 26일) 오후 부산 앞바다에 당도했으나 일본군의 전투 회피로 교전이 이뤄지지 않았다. 가덕도에 잠시 정박한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기습으로 400여 명의 병사를 잃었다. 갑작스러운 지휘관 교체에 병사들의 동요도 컸다. 이순신과 원균은 전술과 지휘 방식에서 너무나 달랐다.

더 이상의 공격은 무리라고 판단한 원균은 철수를 선택하고, 거제 영등포를 거쳐 음력 7월 15일(양력 8월 27일) 밤 칠천량에 닻을 내렸다. 오랜 이동에 지친 병사들이 잠든 그 새벽, 음력 7월 16일(양력 8월 28일) 일본군 700여 척이 기습을 해 왔다.

칠천량은 이전에도 조선 수군의 정박지로 사용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거제도 본섬과 칠천도 사이, 다리 하나로 이어질 만큼 좁은 물목에 160여 척의 대함대가 밀집해 있었다. 나민영 거제시 문화관광해설사는 "조선 수군의 전술은 넓은 바다에서 포를 쏘며 진형을 맞추는 방식이었는데, 이 좁은 해역에서는 그 장점을 전혀 살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단 한 번의 해전으로 이순신 장군이 피와 땀으로 길러낸 거북선 3척과 판옥선 160여 척, 정예 수군 1만여 명이 차가운 바다에 수장됐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을 비롯한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 등 대부분의 지휘관이 포위망을 뚫다가 전사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끄는 판옥선 12척은 간신히 바다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임진왜란 내내 바다를 굳건히 지키며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던 조선 수군의 핵심 전력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의 안내문은 "임진왜란 내내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조선 수군이 처음으로 충격적인 패배를 겪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패전을 단순히 지휘관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기에는 구조적 문제가 너무 컸다. 칠천량의 패배는 전장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전투가 벌어지기 한참 전, 조정의 결정이 이미 패배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중대한 적을 앞두고 지휘관을 성급하게 교체했으며, 현장의 지휘관들이 거듭 육군의 지원 없이 수군만으로는 부산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조정에 요청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칠천량해전공원 전망대.
칠천량 바다.


◇최악의 패전, 그러나 잊어선 안 될 역사

칠천량의 패배는 전쟁 전체의 판도를 바꾼 사건이었다. 이전까지 경상도 동쪽에 머물던 일본군은 거침없이 서쪽으로 진격했다. 조선 수군의 견제가 사라지자 전라도 남원이 함락됐고, 나흘 뒤 전주도 함락되며 수도 한양이 다시 위험에 처했다. 일본군은 사천 등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새롭게 구축했다. 훗날 노량해전의 불씨가 된 순천왜성도 이때 만들어졌다.

칠천량 패전 직후,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됐다. 당시 조정은 수군 폐지와 육군 합류를 명령했으나,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는 장계를 올려 수군을 유지했다. 이후 배설이 확보한 12척에 전라우수영 전선 1척이 더해져 총 13척의 함대가 구성됐다.

때마침 충청도 직산 전투에서 일본 육군이 조·명 연합군에 패하며 기세도 꺾였다. 그리고 이순신이 이끄는 13척의 조선 수군은 명량 앞바다에서 적선 133척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역사상 최악의 패전인 칠천량 전투가 있은 지, 불과 두 달여 만의 기적 같은 대승이었다. 칠천량과 명량은 둘 다 좁은 해역이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칠천량에서 좁은 해역은 조선 수군을 가뒀고, 명량에서 좁은 해역은 일본 수군을 가뒀다.

나 해설사는 "칠천량의 12척이 명량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를 드릴 때 방문객들의 반응이 가장 뜨겁다"고 말했다.
 
 
칠천량해전공원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바다는 오늘도 잠잠하다. 이 고요한 물길 아래 1만여 명의 조선 수군이 잠들어 있다.
 
호국보훈의 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승리의 역사만이 아니다. 승전의 역사는 기념비를 세우고 대대적으로 기억되지만, 패전의 역사는 부끄러움과 아픔이라는 이름 아래 침묵 속에 가라앉는다. 그러나 역사의 교훈은 때로 승리보다 패배 속에 더 선명하게 새겨진다.

문제는 그 패인이 낯설지 않다는 데 있다. 현장의 목소리는 무시됐고, 외부의 이간계에 조직이 흔들렸으며, 정치적 판단이 군사적 합리성을 눌렀다. 위기의 한복판에서 지휘관이 교체됐고, 새로운 전장 환경에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전술은 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과거의 교훈을 제대로 반성하거나 기억하지 않으면, 결국 미래에도 똑같은 과오를 겪게 된다는 뜻이다.

나 해설사는 "패전이라고 해서 외면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교훈을 기억하는 것이 칠천량해전공원을 찾는 이유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임명진기자·취재 도움=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
 
칠천량해전 전시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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