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의 거리두기]한국의 보수는 왜 몰락하는가

견제와 균형의 한 축을 담당할 보수를 재건하는 길은 단순하다
보수는 진보와 싸우는 대신 ‘윤어게인’의 극우와 자신을 구분해야 한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극우가 아니라 더 성숙한 보수주의다
한국의 보수가 몰락하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수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보수당 국민의힘이 몰락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처음 치러진 전국 단위 선거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전국적으로 압승하였다. 당 지도부와 거리를 둔 오세훈 시장의 서울 사수를 제외하면, 국민의힘은 전통 텃밭인 대구·경북과 경남만 지켜냈다. 지방선거 결과를 지도로 보면 보수당이 마치 지역 정당처럼 보이는 게 분명한데도 당대표는 어처구니없이 희망의 불씨를 지켜냈다고 자위한다.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인식은 국민의힘에 닥친 위기가 일시적이기보다는 쉽게 고쳐지지 않는 만성적 질병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보수는 외부적 충격으로 급격하게 추락한 것이 아니라 내부적 요인에 의해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다.
최근 세계의 정치적 경향과 비교해보면, 한국 보수의 몰락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서구 유럽에서는 좌파 정당이 약화되고 우파 정당이 성장하는 우경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독일에서는 일부 지방선거에서 극우 정당인 AfD가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SPD보다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에서도 우익 정치 세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과 달리 한국에서는 오히려 보수 정당이 쇠퇴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선거 전략의 실패라기보다 한국 양당 정치 구조와 보수 정치의 성격과 관련된 구조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전 세계적으로 좌파 정당의 기반인 사회민주주의가 약화하고 새로운 우파 정치가 부상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역사적으로 산업 노동자 계층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 동안 유럽 경제 구조는 크게 변화했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사회는 점차 축소되고 서비스 경제와 지식 경제가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산업 노동자 계층은 급격히 감소했다. 그 결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의존해온 전통적 지지 기반은 약화하고, 새로운 경제 구조 속에서 불안정한 고용과 지역 경제 침체를 경험하는 일부 계층은 기존 좌파 정당보다 반체제적 메시지를 내세우는 우파 포퓰리즘 정당에 더 쉽게 끌리게 된 것이다.
스스로 변하지 못해 자초한 몰락
세계화 시대 국제 경쟁의 심화와 산업 구조 재편은 많은 지역에서 경제적 불안과 지역 격차를 확대하였다. 사회적 지위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특히 유럽에서 난민 문제로 더욱 증폭되었다. 난민은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 문화적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로 인식되기도 한다. 일부 유권자들은 급격한 인구 구성 변화가 자신들의 문화적 환경을 위협한다고 느낀다. 극우 정당들은 난민 문제를 국가 정체성이나 문화적 생존의 문제로 프레이밍하며 이러한 불안을 정치적으로 활용한다. 반면 전통적인 좌파 정당은 인권과 다문화주의를 강조하는 입장을 취하는 까닭에 일부 유권자들은 좌파 정당이 자신들의 경제적, 문화적 불안을 충분히 대변하지 못한다고 느끼게 된다.
서구 유럽에서 좌파 정당이 쇠락하는 다른 중요한 요인은 좌파 정당의 정체성 위기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1990년대 이후 “제3의 길”이라고 불리는 노선을 통해 시장경제와 복지국가를 결합하려 했다. 이러한 정책은 일정 기간 경제적 성과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좌파 정당의 전통적 정체성을 약화시켰다. 많은 유권자는 좌파 정당이 더 이상 노동 계층의 이익을 분명하게 대변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서구 정치의 우경화를 가져온 이러한 요인들이 한국에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비교적 난민 문제의 정치적 부담이 없기는 하지만 산업 구조의 변화로 인한 경제적 불안, 미래의 불확실성과 세대 갈등으로 인한 문화적 불안, 그리고 정치적 정체성의 혼란은 정당의 변화를 압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보수가 쇠락하는 것은 이러한 정치적 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스스로 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보수가 앓고 있는 정치적 만성병을 치유하려면 먼저 스스로 변하지 못한 이유를 간파해야 한다. 국민의힘이 더 이상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도대체 보수를 지지하였고 또 지지하는가? 보수를 지지하는 첫 번째 이유는 보수주의로 대변되는 이념과 가치 때문이다. 좌파가 비교적 자유보다 평등을 우선시하고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한다면, 우파는 대체로 평등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중심에 놓는 ‘자유민주주의’를 대변한다. 따라서 진정한 보수주의는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민주적 절차, 헌정 질서 및 법치를 중시한다. 그런데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이러한 가치 보수주의마저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자유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살던 대통령이 스스로 헌정 질서를 훼손하는 것만큼 가치 보수주의를 희화화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보수주의자에게 법치, 시장경제, 제도적 안정, 그리고 시민의 자유는 훼손될 수 없는 핵심 가치이고 원칙이다. 서구의 보수 정당은 이러한 정치적 원칙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반면 한국 보수 정당의 역사적 과정은 상당히 다르다. 한국 보수 정치의 뿌리는 정치철학적 보수주의라기보다 냉전 체제 및 권위주의 국가 형성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한국 보수 정당은 전통적으로 반공주의, 안보 정치, 국가 중심 경제 성장과 같은 정치적 의제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이러한 정치적 정당성은 점점 약화되었다. 그 결과 한국 보수 정당은 새로운 이념적 정체성을 충분히 확립하지 못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보수적 가치가 없는 보수 정당은 어쩔 수 없이 극우로 귀결된다.
국힘, 윤어게인과 결별해야 산다
한국에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두 번째 이유는 상대 당이 싫어서이다. 서구 유럽과 달리 오랜 기간 양당 중심 정치가 공고해진 한국의 정치 구조에서 상대 당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하는가에 따라 지지율이 변화한다. 경쟁적 양당 정치가 적대적인 진영 정치로 변질될수록 모든 정당은 상대 당에 의존하게 되고, 스스로 변하기 어려워진다. 행정력과 정치력이 전혀 검증되지 않았는데도 상대 당이 가장 싫어한다는 이유로 검찰총장 출신을 대통령으로 내세운 순간, 국민의힘은 이미 정치적 자생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다는 것은 싫어하고 싸워야 할 이유가 점점 더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의힘은 지금 어떻게 싸워야 할지조차 모를 정도로 상황 파악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끝으로, 한국에서 보수를 지지하는 마지막 이유는 어쩌면 가장 합리적인 동기일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는 진보와 보수가 서로 경쟁하면서도 균형을 이루는 정치체제이다. 만약 한쪽 축이 약화하면 정치적 균형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권력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팽창하려는 성질이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액턴 경의 말처럼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아무리 도덕적인 정치인이라 할지라도 외부의 통제가 없는 절대적 권력 앞에서는 사적인 이익이나 판단 착오에 휘둘릴 수 있다. 따라서 견제와 균형은 권력을 입법, 행정, 사법으로 분산시켜 서로 감시하게 함으로써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독주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민주주의의 핵심 장치이다. 이미 입법 권력을 장악한 정당이 사법부마저 위협할 정도로 비대해진다면 민주주의의 토대는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 보수가 진보를 견제할 정도로 견고해지는 것이 합리적이고 좋기는 하지만, 단지 이러한 이유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야당을 지지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도층마저 보수에 등을 돌리고 있다. 견제와 균형을 위해 보수가 살아나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면서도 많은 유권자가 보수를 지지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가 살아나려면 자유와 민주주의 제도를 지킬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계엄의 늪에서 벗어나 ‘윤어게인’의 극우 이미지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한, 국민의힘은 결코 진정한 보수의 힘이 되지 못할 것이다. 견제와 균형의 한 축을 담당할 보수를 재건하는 길은 사실 단순하다. 보수는 진보와 싸우는 대신 극우와 자신을 구분해야 한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극우가 아니라 더 성숙한 보수주의다. 보수는 과연 이번 지방선거로 정신 차리고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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