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누구의 미래를 구원하는가
AI·특이점·장기론을 통해 묻는 기술 만능주의의 위험
기술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착각(애덤 베커 지음/박주용 옮김/동아시아/496쪽/2만 2000원)

기술은 늘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해 왔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생명공학은 노화와 질병을 정복하며, 우주 개발은 인류의 다음 거처를 열어줄 것처럼 말이다. '기술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착각'은 이 낙관의 언어를 정면으로 의심한다. 저자는 실리콘밸리의 거대한 비전이 과학적 예측인지, 막대한 자본과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 만든 세계관인지 따져 묻는다.
책은 인공일반지능, 특이점, 효율적 이타주의, 장기론, 기술 가속주의 같은 개념을 하나의 흐름 안에서 추적한다. 겉으로는 서로 다른 주장처럼 보이지만, 그 바탕에는 기술 발전은 피할 수 없고 인류의 미래는 소수 전문가와 투자자가 설계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저자는 이 전제가 어떻게 도덕적 언어를 입고 현재의 권력 구조를 정당화하는지 파고든다.
특히 효율적 이타주의와 장기론을 다룬 대목은 인상적이다. 고통을 줄이자는 선한 출발점은 어느 순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인류를 위해 현재의 문제를 뒤로 미루는 논리로 바뀐다. 그 과정에서 빈곤, 기후위기, 전쟁처럼 눈앞의 고통은 상대적으로 작게 취급되고, 발생 가능성이 불확실한 AI 대재앙이나 우주 식민지 건설이 더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다. 책은 이런 계산 방식이 얼마나 위험한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구체적 사례로 보여준다.
AI 종말론에 대한 분석도 단순한 반박에 그치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인류를 위협할 수 있다는 공포는 오히려 현재의 문제를 가리는 역할을 한다. 알고리즘 편향, 감시 확대, 노동 대체, 에너지 소비처럼 이미 발생한 쟁점보다 먼 미래의 파국이 더 큰 화제가 될 때, 기술 기업은 규제 논의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와 무한한 진보를 외치는 주장이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짚는다.
우리는 이 같은 광경을 이미 목도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는 미 연방정부의 예산 삭감을 주도했고, 오픈AI는 비영리법인에서 영리 기업으로의 전환을 마쳤다. 빅테크 기업들의 시가총액은 웬만한 국가의 GDP를 초월한다. AI 패권 경쟁, 반도체 공급망 재편, 빅테크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 이 같은 현상은 한국 사회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삼성과 SK 같은 반도체 기업이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축을 이루고, AI 기술 도입이 산업 전반에서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의 비전이 어떤 사상적 토대 위에 서 있는지 이해하는 것은 교양이 아닌 전략적 필수 과제다.
인류의 미래를 누가 말하고, 그 말은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기술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정치와 윤리, 불평등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AI와 빅테크, 스타트업 담론이 일상으로 들어온 지금 이 책은 기술을 둘러싼 언어를 다시 읽게 만든다. 기술 낙관론에 익숙한 독자, AI 시대의 권력 구조를 이해하고 싶은 이들, 미래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책임이 지워지는 과정을 살피고 싶은 사람에게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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