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타설 밀리면 다음 공정도 줄줄이”… 레미콘車 휴업에 아파트·반도체 공사장 ‘비상’

“삐삐삐. 접근하지 마세요. 위험합니다.”
9일 오전 10시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 건설 현장. 대형 크레인이 자재를 들어 올렸고, 안전모를 쓴 인부들은 현장을 분주히 오갔다. 공사장 곳곳에서는 장비 경고음과 작업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레미콘을 실은 믹서트럭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이날 현장에서는 레미콘을 부어 넣는 타설 작업이 예정돼 있었지만, 수도권 레미콘 운송노조가 운송을 중단하면서 일정이 밀렸다. 현장 관계자는 “당장 투입 인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서도 “타설이 멈추면 다음 공정도 줄줄이 영향을 받을 수 있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수도권 레미콘 운송노조가 전날 오전 8시부터 믹서트럭 운행을 멈추면서 건설 현장들이 공정 조정에 들어갔다. 당장은 철근·거푸집·자재 정리 등 가능한 작업을 먼저 진행하고 있지만, 운송 중단이 길어지면 공사 차질은 불가피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레미콘 운송노조, 무기한 운송 중단 돌입
전국레미콘운송노동조합(전운련)은 서울·경기·인천 지역 운송단가 인상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휴업에 돌입했다. 운행을 멈춘 믹서트럭은 약 1만1000대에 달한다.

여파는 곧바로 공사장으로 번졌다. 대우건설은 수도권 주요 지역의 레미콘 타설 공정을 중단했다. 현대건설도 국내 건설 현장 130여곳 가운데 30곳에서 타설 작업을 멈췄다. 삼성물산 역시 타설 공정 대신 다른 작업을 우선 진행하도록 현장에 지시했다.
레미콘 타설은 보통 골조 공사 단계에서 이뤄진다. 아파트 공사로 보면 공정률 15~20% 안팎의 초기 단계다. 콘크리트를 제때 붓지 못하면 골조 공정이 밀리고, 이후 내·외부 마감과 설비 공정도 순차적으로 지연될 수 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타설이 하루 늦어진다고 곧바로 전체 공정이 멈추는 것은 아니지만, 3~4일 이상 이어지면 현장별로 일정 재조정이 불가피하다”며 “초기 골조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장일수록 타격이 클 수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타설 일정이 계속 밀리면 투입 인력과 장비 계획을 다시 짜야 한다”며 “장기화하면 현장 인원 조정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대형 공장 건설 현장도 예외가 아니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SK하이닉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대규모 산업 시설 공사도 레미콘 수급에 차질이 생기면 공정 관리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쟁점은 운송단가보다 ‘교섭 지위’
전운련은 운송단가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핵심 쟁점은 단가 자체보다 ‘단체교섭 지위’에 있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레미콘 운송 종사자 상당수는 개인 소유의 믹서트럭을 운행하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다. 레미콘 제조사들이 이들을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봐온 배경이다.
그러나 최근 서울행정법원이 레미콘 운송 종사자의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성을 인정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고용노동부도 지난 3월 전운련에 노조 설립필증을 교부했다. 사실상 노조의 공식 지위를 인정한 것이다.

전운련은 정식 노조가 된 만큼 사측이 단체교섭에 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사측은 반발하고 있다. 서울행정법원 1심 판결에 대한 항소심이 진행 중인데, 지금 단체교섭에 응하라는 것은 사실상 항소를 포기하라는 요구라는 것이다.
양측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건설업계의 불안도 커지고 있다. 대한건설협회는 정부에 전운련과 레미콘 제조사 간 협상 재개를 위한 중재를 요청했다.
대한건설협회 관계자는 “이번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국토교통부와 핫라인을 가동해 현장의 피해 상황을 점검하고 협의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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