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포르투갈 ‘해안길(Camino Costa)’을 또다시 걷다 [앵+글로 본 남도세상]

이건상 기자 2026. 6. 9.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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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에서 시작해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전통 내륙길 순례를 마친 뒤, 나는 다시 버스를 타고 포르투로 이동했다. 그리고 마토지뉴스(Matosinhos)에서 해안길 순례와 답사, 여행을 다시 시작했다. 세 번째 순례길에 들어선 것이다.

첫 번째 프랑스길의 드넓은 밀밭과 두 번째 포르투갈 순례길 내륙길(Central)의 고요한 돌담길이 주는 깊은 침묵도 좋지만, 가슴속까지 뻥 뚫리는 대서양의 푸른 숨결을 마주하며 걷는 길은 또 다른 구도(求道)다.

포르투갈 제2의 도시 포르투 인근 마토지뉴스를 시작으로 북쪽을 향해 뻗어 있는 '포르투갈 순례길 해안길(Camino Portugues de la Costa)'. 사진가의 프레임에 담긴 이 길은 단순한 고행의 길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가장 평화롭게 공존하는 '치유(Healing)의 길'이었다.

특히 대서양 해안길의 끝없는 나무 데크와 모래사구를 마주할 때마다 아름다웠던 우리 남도의 바다, 신안 임자도,우이도와 병풍도의 '섬티아고(기점·소악도 12사도 길)' 풍경이 겹쳐 보였다.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바다의 서정을 지면에 담아본다.
 
마토지뉴스(Matosinhos)에서 해안길 순례와 답사, 여행을 다시 시작했다. 세 번째 순례길에 들어선 것이다.

■ 해무가 깨운 이른 아침, 사구(砂丘)와 데크길에서 만난 남도

포르투갈 해안길의 아침은 몽환적이다. 밤새 대서양이 품어낸 짙은 해무(海霧)가 해안가를 가득 채우며 순례자의 발끝을 감싼다. 안개 속을 걷다 보면 이내 아침 햇살이 해무를 걷어내며 황금빛 사구(모래언덕)를 드러낸다.

사구 위로는 척박한 모래 환경을 이겨내고 피어난 강인한 사구식물들이 초록빛, 노란빛 얼굴을 내밀며 카메라 렌즈를 붙잡는다. 이 풍경은 자연 그대로의 해변을 품은 신안 우이도의 해안사구 식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내륙길이 단단한 흙길과 돌바닥으로 순례자의 무릎을 시험한다면, 해안길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따라 끝없이 이어진 나무 데크길로 순례자를 환대한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이는 데크의 규칙적인 소리는 대서양의 파도 소리와 어우러져 천연의 백색소음이 되고, 지친 순례자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해무가 깨운 이른 아침, 사구(砂丘)와 데크길에서 만난 남도

■ 일상이 축제인 바다, 서퍼와 선탠을 즐기는 사람들

해안길이 가진 최고의 매력은 '살아 있는 삶의 활력'을 곁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른 아침부터 차가운 바닷바람을 뚫고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며 손을 흔들어 주는 현지인들의 건강한 미소는 순례자에게 큰 에너지가 된다.

정오를 지나 해가 머리 위에 걸리면 대서양의 해수욕장은 활기로 가득 찬다. 뜨거운 태양 아래 온몸으로 햇살을 만끽하며 선탠을 즐기는 사람들, 그리고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자유를 만끽하는 서퍼들의 풍경은 이 길이 종교적 고독감에만 갇혀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순례자의 걸음 곁으로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들의 휴양과 여유는 삶 자체가 곧 축제이자 여행임을 깨닫게 한다.

■ 세월을 품은 풍차와 마을 중심의 성당, 그리고 '섬티아고'

마토지뉴스를 떠나 빌라 샤(Vila Cha), 빌라 두 콘드(Vila do Conde), 에스포센드(Esposende)를 거쳐 비아나 두 카스텔루(Viana do Castelo)로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포르투갈의 역사와 전통은 오롯이 빛난다.

해안가의 거센 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서 있는 오래된 석조 풍차들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다가온다. 데크길을 벗어나 오래된 어촌 마을이나 도심으로 접어들면 어김없이 마을 중심에는 웅장하고 경건한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성당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기도를 올리는 순간, 대서양의 바람은 평온으로 찾아온다.

마을 중심의 성당을 마주할 때마다 지난 4월 동료들과 함께 걸었던 신안 병풍도와 기점·소악도의 '섬티아고' 길에 있는 아담한 예배당들이 겹쳐 보였다. 갯벌과 노둣길을 따라 세워진 남도의 작은 예배당들이 치유의 장소라면, 대서양의 거친 바람 끝에 서 있는 포르투갈의 성당들은 수백 년 동안 바다로 나간 가족을 기다리던 이들의 간절한 기도가 쌓인 역사의 공간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기도 공간을 찾아 걷는다는 점에서 두 길은 마법처럼 닮아 있다고 느껴진다.

■ "한 번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이 길을…"

비가 내린 뒤 맑게 갠 하늘 아래, 씻은 듯 선명해진 대서양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 가지 울림이 퍼진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나 혼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걸으면 얼마나 좋을까.'

포르투갈 해안길은 경사도가 완만하고 길목마다 아름다운 휴양 마을과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신안의 증도나 임자도 해변을 가족과 평화롭게 거닐 때처럼 광활한 바다를 배경으로 가족의 손을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치열한 일상에 지친 가족들에게 대서양의 푸른 위로와 치유를 선물하고 싶은 마음. 그것은 이 길을 걷는 모든 순례자가 느끼는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포르투갈 내륙길이 '나를 찾아가는 고독한 내면의 여행'이라면, 해안길은 '자연과 인간, 삶의 활력이 주는 치유의 축제'다. 우리 남도 신안의 섬길이 주는 아늑함과 대서양이 주는 광활함이 머릿속에서 멋지게 교차하는 밤이다.

대서양의 푸른 파도는 오늘도 지친 순례자들에게 속삭인다.

"한 걸음 늦어도 괜찮다."
김덕일 작가.(왼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