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즐거운 우(雨)요일

안애정 시인·수필가·문향회 회장 2026. 6. 9.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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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안애정 시인·수필가·문향회 회장

모처럼 쉬는 날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이 바쁘다. 주말에도 집안일하다 보면 하루해가 금세 서쪽 산을 넘어간다. 그런데 오늘처럼 중간에 쉬는 날이 생기면 생각하지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마냥 아이처럼 마음이 들뜬다.
 더욱이 비까지 내려오니 세상은 빗소리뿐이고, 빗금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온통 초록이다. 물방울 맺힌 나뭇잎에 손을 대면 내 손끝도 초록빛으로 물들 것만 같다. 나는 초록의 반란이 반갑다. 꽃들이 잠시 뒤로 물러난 자리에 나무와 풀들이 제 빛을 드러낸다. 비를 머금은 잎들은 더욱 짙어지고, 세상은 초록 하나로 가득 찬다.

 남편은 모처럼 쉬는 날인데 비가 와서 어쩌냐고 말하지만, 나는 오히려 비 오는 날이 좋다. 굳이 만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꼭 어디를 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만큼은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뒹굴어도 괜찮다.  
 "나는 오늘, 파업이야"
 남편에게 당당하게 선언한 뒤 나만의 공간인 2층으로 올라온다. 친정엄마와 함께 살다 보니 늘 세 끼 식사를 챙겨드려야 한다. 하지만 오늘만은 남편에게 모든 걸 맡긴다. 가끔 내가 누리는 특권이다.

 침대에 기대어 읽다 만 책을 펼친다. 마음에 드는 문구는 연필로 밑줄을 긋고 여백에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낙서하듯 적어둔다. 평소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몇 장 읽지도 못하고 덮어두었던 책이다. 오늘은 어디에도 쫓기지 않으니 한 문장을 읽고도 오래 머물 수 있다.
 조금 열어둔 베란다 창문 너머로 빗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세차게 쏟아지던 비가 잦아졌나 보다. 지붕을 타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조용한 배경음악처럼 방 안을 채운다. 책을 읽다가도 가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비에 씻긴 나무들은 유난히 선명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잎들은 초록빛 파도처럼 일렁인다.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루 끝에 앉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한참 바라보곤 했다. 밖에서 뛰어놀 수 없어 심심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 비 오는 날만큼은 마음이 편안했다. 빗줄기가 세상을 가려 주면 해야 할 일도, 가야 할 곳도 잠시 멈춘 것 같았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 마음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비는 여전히 나를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시간 속으로 데려다 놓는다.
 생각해 보면 비 오는 날이 좋은 이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핑계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맑은 날에는 괜히 어딘가 가야 할 것 같고,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은 다르다. 세상도 잠시 쉬어가는 것 같아, 나 역시 마음 놓고 게으를 수 있다.

 문득 생각한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처럼 요일 이름 사이에 '우요일'도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고. 비가 오는 날이면 누구나 잠시 속도를 늦추고, 꼭 해야 하는 일 말고는 다음으로 미뤄도 되는 날.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마음까지 촉촉해지는 날 말이다.
 달력에는 없지만 내 마음에는 분명히 있는 요일, 우요일. 어쩌면 우요일은 비가 와서 생기는 날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쁘게 달리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싶을 때, 아무 이유 없이 쉬고 싶을 때,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 오는 날은 그런 마음을 가장 자연스럽게 허락해 준다. 
 비는 내게 잠시 쉬어가도 된다고 말해준다. 그래서 비가 내려 천천히 마음이 쉬어가는 날, 나에게 오늘은 즐거운 우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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