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세계 최대 미래형 항만 '투아스'가 부산에 던진 질문[[k해운 in 싱가포르-⑤]

민지형 기자 2026. 6. 9.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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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는 24시간 '완전 무인화' 항만 준비 착착
환적 넘어 생태계 경쟁시대, 부산항은 어떤 미래 준비하나
PSA 호라이즌 빌딩 전망대에서 본 파시르 판장 터미널.

지난달 28일 오후 싱가포르 도심에서 차량으로 40여분 달려 도착한 남서부 해안의 파시르 판장(Pasir Panjang) 터미널. 19층 높이 전망대에 오르자 형형색색의 컨테이너가 끝없이 이어진 거대한 격자무늬가 시야를 채웠다. 길이 400미터(m)에 달하는 초대형선들이 선석에 빼곡히 접안해 있고, 높이 50m가 넘는 안벽 크레인들이 쉼 없이 컨테이너를 들어 올렸다. 국적선사 HMM의 2만4000TEU급 ‘코펜하겐호’도 짙은 남색 선체 위로 컨테이너를 산맥처럼 쌓아 올린 채 위용을 드러냈다.

이곳은 세계 1위 환적항만 운영사 PSA 핵심 기지다. 지난해 PSA 싱가포르 터미널 처리 물량은 부산항(2488만 TEU)을 크게 웃도는 4450만 TEU. 이 가운데 파시르 판장 에서만 3200만 TEU를 맡았다. 미·중 갈등과 홍해 사태 등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아시아 최대 환적 허브 싱가포르의 전략적 가치가 한층 높아졌다고 한다. PSA 대변인은 "물류 차질을 우려하는 글로벌 화주들이 화물을 최종 목적지로 보내기 전, 가장 안전한 환적 거점인 싱가포르에 미리 가져다 둔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항 컨테이너 90%는 싱가포르를 목적지로 하지 않는 환적 화물이다. 파시르 판장은 거대한 컨테이너 창고가 아니라 전 세계 화물이 끊임없이 갈아타는 '환승역'에 가깝다. 부두 배치부터 정교하고 깔끔했다. 얼라이언스 별로 구역을 나누는데 HMM이 속한 '프리미어 얼라이언스(HMM·ONE·양밍)' 선석이 한 구역에 모여 있고, 반대편엔 오션 얼라이언스(CMA CGM·에버그린·코스코)' 컨테이너가 쌓여있었다. 동맹 파트너끼리 부두를 붙여 배치해야 컨테이너 이동 동선을 줄이고 빠르게 화물을 교환할 수 있다.

파시르 판장의 또 다른 얼굴은 자동화다. 항만 특유의 매연이나 소음, 북적이는 인부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정돈된 현장엔 크레인 작동음만 울렸고, 야드 크레인 상당수가 원격으로 운영됐다. 대변인은 "이제는 통제 센터에 앉아 모니터로 여러 대를 움직이며, 예외 상황에만 개입하니 운영자 1명이 7~8대를 동시에 관리한다"고 했다.

특히 파시르 판장은 100% 무인으로 가동될 투아스(Tuas) 신항을 위한 거대한 '테스트베드'라고 대변인은 전했다. 투아스에 전면 도입될 기술이 이곳에서 실전 검증을 거친다. 2040년 투아스가 완전 개장하면 파시르 판장은 정부에 부지를 반납하고 문을 닫는다. 땅이 좁은 싱가포르는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투아스 항만을 만들고, 파시르 판장은 다시 상업 개발을 할 예정이다. 파시르 판장은 국제적인 관광지 센토사섬에서 한 눈에 보이는 곳이다.

투아스는 파시르 판장에서도 차량으로 다시 서부 해안을 따라 45분 정도 달려야 나온다. 바다를 메워 건설 중인 투아스 메가포트는 2019년 착공해 2022년 9월 1단계 운영에 들어갔고, 완전 가동되는 2040년대에는 단일 부지 기준 세계 최대 완전자동화 컨테이너 터미널이 된다. 연간 처리능력은 6500만 TEU에 달한다.

파시르 판장 터미널 전용 선석에 정박한 HMM 코펜하겐호.


항만 스펙은 압도적이다. 안벽 수심 23m, 총 선석 길이 26km. 대변인은 "HMM의 2만 4000TEU급 초대형선이 화물을 가득 싣고 들어와도 넉넉하게 하역할 규모"라고 자신했다. 완공 시 약 1337만 제곱미터 부지에 66개 선석을 갖추게 된다.

투아스는 '완전 무인화' 항만으로 추진된다. 이미 가동에 돌입한 12개 선석 주변으로는 300대가 넘는 무인운반차량(AGV)과 자동 야드 크레인이 배치됐다. 무게 28톤의 AGV는 65톤 화물을 거뜬히 나르고, 일반 전기차보다 9배 강력한 충전 설비로 20분 급속 충전하면 6~8시간을 쉼 없이 일한다. '꽃게'처럼 옆으로도 움직여 동선을 최소화한다.

여기에 친환경이 더해진다. PSA에 따르면 디젤 장비를 전기 AGV로 대체하며 현장 탄소배출량은 50% 감축됐다. 대변인은 "투아스는 해상·육상·항공을 연결하는 세계 최대 지능형 물류 생태계로 거듭날 것"이라고 밝혔다. 항만 옆에는 2027년 개장 예정인 'PSA 공급망 허브'가 들어선다. 지역 물류센터와 컨테이너 화물 집화장을 결합한 시설이다. 

데이터 기반 스마트 공급망을 구축한 거대한 '지능형 플랫폼'으로의 전환이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풍경은 북극항로를 발판으로 재도약을 기대하고 있는 글로벌 환적 2위 부산항에 질문을 던진다.

정부는 2045년까지 14조원을 투입해 진해신항을 구축, 투아스와 동일한 66개 선석을 짓고 3만 TEU급 선박까지 접안할 시설을 만들 계획이다. 진해신항 1단계는 2029년 3선석 우선 개장을 목표로 전 영역에 완전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할 방침이다. 다만 항만노조 등의 무인화 반대 움직임 등이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실제 투아스가 2022년부터 무인 선석을 가동하며 경험을 축적하는 동안, 한국은 2026년까지 광양항에 자동화 테스트베드를 구축하고 2030년부터 부산항 제2신항에 국산 기술을 도입한다는 일정만 내놓고 있다. 이미 출발선의 격차를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이재명 정부가 '북극항로'를 국정과제로 내세운 것도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해운업계에 따르면 부산의 펜스타 선박이 이르면 9월 북극항로 시범 운항에 나설 계획이다. 북극항로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기존 수에즈 항로 대비 거리와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며, 무엇보다 부산이 그 출발점이 된다. 환적 화물을 두고 싱가포르와 정면 경쟁하는 동시에, 새로운 항로의 관문을 선점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 하나 투아스에서 배울 것은 '항만은 더 이상 항만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해운산업 생태계 확장으로 접근할 때 폭발력을 갖는다는 의미다. 항만·물류·배후산업을 통합 생태계로 묶으려는 투아스 모델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투아스 항만을 내려다보며 도시·산업·금융과 엮어내는 '통합의 설계도'가 부산항에도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투아스는 더 큰 항만을 짓는 사업이 아니라, 누가 화물의 흐름을 거머쥘 것인가를 둘러싼 경쟁이다. 부산항은 기존 환적 규칙 안에서 싱가포르를 추격하는 동시에, 북극항로라는 새 판을 열어 게임의 규칙 자체를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향해 달리는 PSA를 지켜보며, 부산항에 던질 질문은 분명해졌다. 우리는 지금 어떤 미래를 짓고 있는가.

*이 기사는 (재)바다의품과 (사)한국해양기자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

민지형 머니투데이방송 MTN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