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는 청년의 분노를 이용 말라”… 186개大 번진 투표용지 부족 규탄

황채영 기자 2026. 6. 9.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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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대자보 엿새 만에 361개
재선거·재투표 요구는 6%뿐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학생회관 앞에 성대신문 등 교내 언론사 학생들이 작성한 '투표용지 부족사태' 관련 중앙선관위 규탄 대자보가 붙어 있다. /연합뉴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6·3 지방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성명과 대자보가 전국 대학가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 대학생들은 이번 사태를 참정권 침해이자 선거 관리 부실로 규정하며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다만 대학가 내부에서는 이번 사안을 계기로 제기되는 ‘부정선거론’과는 선을 그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선거 관리 실패에 대한 비판과 선거 결과 조작 주장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성명·대자보 65%가 재발 방지 대책 요구

9일 ‘한표의 기록’에 따르면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불거진 이후 6일 동안 전국 186개 대학에서 관련 성명과 대자보 361건이 게시된 것으로 집계됐다. ‘한표의 기록’은 각 대학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 관련 규탄 성명과 대자보를 취합하는 사이트다.

전국 대학 '투표용지 부족 사태' 규탄 시국성명 및 대자보를 모아놓은 사이트/'한 표의 기록' 홈페이지 캡쳐

이번 움직임은 지난 4일 경희대와 한국외대 총학생회가 ‘참정권 침해 규탄’ 대자보를 낸 것을 시작으로 빠르게 확산했다. 이후 총학생회뿐 아니라 단과대 학생회, 학과, 소모임, 개인 명의의 성명과 대자보까지 잇따라 나오면서 대학가 전반으로 번졌다.

‘한표의 기록’이 361건의 성명·대자보에 담긴 요구 사항을 분석한 결과, 복수 집계 기준으로 ‘재발 방지 대책’이 65%(233건)로 가장 많았다. 이어 선관위·당국 규탄 51%(183건), 진상 규명 39%(141건), 책임자 처벌·사퇴 33%(119건) 순이었다. 재선거·재투표 요구는 6%(20건)에 그쳤다. 대학가의 문제의식이 단순한 정치적 구호보다 선거 관리 체계의 정상화와 책임 규명에 더 쏠려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실제 각 대학이 내놓은 성명에는 이번 사태를 정쟁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적지 않게 담겼다. 서울대 단과대학생회장연석회의는 지난 5일 성명에서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적 권리가 방해받는 작금의 상황은 결코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정쟁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도 안 된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사태를 근거로 그간의 선거 결과, 그리고 민주적 선거 체제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반발한 시민들이 9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 설치된 개표소 앞에서 재선거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고려대 총학생회 중앙비상대책위원회도 “정쟁을 넘어, 주권자의 권리를 흔든 선거 관리 부실의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이라고 했다. 서강대 총학생회 역시 대자보에서 “정치권과 사회 각계는 이번 사안을 정쟁의 도구로 삼는 행태를 중단하라”고 했다.

◇“선거 부실과 선거 결과 조작은 다른 문제”

대학가에서는 외부 개입으로 선거 결과가 조작됐다는 취지의 ‘부정선거론’과 거리를 두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서울대 학생들은 전날 서울대 학생회관 앞에서 ‘공동행동’을 열고 “극우 단체의 시국선언은 대중의 정당한 분노를 이용해 부정선거 음모론을 설파하고 대학가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당 대자보에는 재학생과 동문 174명이 서명했다.

이 대자보에는 “선관위의 선거 관리 부실은 지탄받아야 마땅하고 철저한 조사와 책임자 처벌이 뒤따라야 하지만, 국가기관에 의한 선거 결과 조작이라는 의미에서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내용이 담겼다.

건국대에서도 같은 날 ‘선관위를 향한 정당한 불신을 이용한 극우 준동에 반대하는 건국대인’이라는 제목의 성명에 대한 연서명이 시작됐다. 이들은 대자보에서 “선거 관리 부실이 극우 세력의 부정선거 음모론에 빌미를 줬다”면서도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대학 구성원들은 극우의 위장술에 속지도, 그들 호소에 호응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100명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반발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일대에서도 비슷한 기류가 감지된다.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구호를 ‘부정선거’가 아닌 ‘재선거’로 한정해야 한다는 등의 선 긋기가 나타난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현상을 청년층의 참정권 침해 문제의식이 분출된 결과로 해석한다. 동시에 이들이 자신들의 분노가 특정 정치세력이나 음모론에 의해 소비되는 것에도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이번 문제의 본질은 청년층이 느낀 사회적 좌절과 박탈감 등이 선관위 사태를 계기로 표출된 것”이라며 “청년들이 자신들의 입장과는 구분되는 외부 정치세력이 집회 공간으로 들어오는 데 반발하는 양상”이라고 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한국외대 총학생회(좌측), 경희대 총학생회(우측) 대자보/뉴스1

◇전국 12개 총학 동시 시국선언

대학가의 움직임은 이날 공동 시국선언으로도 이어질 예정이다. 10일 오후 6시 전국 12개 대학 총학생회는 6·10 민주항쟁 기념일을 맞아 각 캠퍼스에서 동시에 집회를 열고 시국선언을 발표한다. 참여 대학은 건국대·고려대·경희대·서강대·서울대·서울시립대·성균관대·숭실대·연세대·전남대·한국외대·홍익대 등이다.

이들이 발표할 시국선언에는 국정조사와 특별검사를 통한 진상 조사 및 책임자 처벌, 국가 기본권 침해 구제 대책 마련,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구조 개혁, 시민 참여형 개혁 감시기구 설치 등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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