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의 청년들이 묻는다… “주권자가 여기 있다, 국가는 어디에 있나”[허민의 정치카페]

2026. 6. 9.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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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민의 정치카페 - 청년들이 잠실에 모인 까닭
‘李 투표 독려 후 투표용지 증발’ 정치우화… 분연히 일어난 청년들 ‘국가의 부재’ 물어
잠실 참정권운동은 21세기형 ‘만민공동회’… ‘잃어버린 세대’에서 ‘깨어난 세대’로 이행

6·3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항의하는 ‘잠실 참정권 운동’이 지난 5일부터 닷새째 이어졌다. 서울 송파구 잠실 개표소인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부근에는 연일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 명에 이르는 ‘주권자’들이 모였다. 상당수가 2030 청년들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방선거 본투표 직전 플라톤의 ‘국가’를 인용해 시민의 정치 무관심을 질타하고 투표 참여를 독려했다. 그러나 국가는 투표장으로 온 주권자를 맞이하지 못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국가의 부재를 드러냈다.

◇아이러니한 정치 우화

이 대통령이 인용한 플라톤의 경구는 대체로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열등한 자에게 지배받는 것’이라는 뜻이다. 내용적으로는 반대 진영의 우세를 막기 위한 지지층 동원령으로 해석되지만, 어쨌든 투표 독려의 형식을 취했다.

그런데 정작 투표일에 국가가 준비해야 할 투표용지가 부족했다. 시민의 투표 참여를 촉구한 국가가 정치 참여의 가장 기본적인 물적 조건을 보장하지 못한 것이다. 투표용지가 부족한 투표소가 8일 기준 전국 91곳에 달했고, 그중 26곳에서는 한때 투표가 멈췄다. 대통령의 투표 독려 직후 벌어진 투표용지의 증발이라니, 아이러니한 정치 우화다.

플라톤이 갖고 있던 원래의 문제의식은 권력과 책임의 관계 설정에 있었다. 권력을 ‘탐’하는 사람이 아니라, 권력을 무거운 ‘짐’으로 여기는 사람이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대통령은 시민에게 정치적 책임을 요구했지만, 막상 국가는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시민은 투표하러 갔는데 국가가 시민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투표용지 한 장의 가치는 우주만큼 무겁다. 그 한 장에는 주권자의 시간과 열정, 신뢰와 권리, 분노와 희망, 그리고 국가와 개인 사이의 계약이 담겨 있다. 대통령의 발언은 그대로 자신을 향한 부메랑이 됐다. 대통령은 투표용지 부재 사건의 최종 책임자이다.

잠실 참정권 운동은 플라톤의 경구를 대통령 자신에게 돌려줬다. 대통령은 플라톤을 빌려 국민에게 투표를 촉구하는 듯했지만, 플라톤은 대통령에게 권력의 자격을 물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부실한 선거 관리로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공소취소 법안으로 법치주의를 훼손한다는 국민의 우려에 대통령은 무엇으로 답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21세기 만민공동회

기자가 주말에 잠실 현장에서 만난 청년들은 투표용지 부족을 ‘행정 착오’ 아닌 ‘참정권 침해’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이념을 떠나 민주시민으로서의 권리 침해에 분노했고, 선거절차의 공정성에 이의를 제기했으며, ‘재선거’를 통해 절차의 정당성을 되찾고자 했다.

청년들은 기성세대의 비겁한 침묵을 뚫고 스스로 분연히 일어났다. 모두 자발적으로 모였고 질서정연했다. 모임을 조직하고 지휘하는 컨트롤 타워도, 제대로 꾸며진 무대도 없었다. 주최 측이 불러온 유명인사들이 무대에 올라 선동했던 여타의 시국집회와는 달랐다. 청년과 시민이 함께 외치고 노래하는 하나의 거대한 공연이자 축제였다.

청년들이 직접 태극기를 그려 서로 나눠 가졌다. 전국의 시민들이 먹을 것을 보내오고, 누구든 필요한 만큼 가져갔다. 청년들은 경찰들에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를 보냈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비폭력 시민저항운동이자 21세기형 만민공동회였다”고 했고, 구민교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새로운 정치 DNA를 갖춘 세대가 등장했다”고 평가했다.

참담한 것은 참정권 운동을 대하는 좌파의 인식이다. 친여 유튜브 ‘매불쇼’의 최욱은 이들을 겨냥해 “전두환식 탱크로 밀어버려야”라고 했다. 정준희 한양대 언론정보대학 겸임교수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몽둥이를 드는 것이 필요하다. 설득이 아니라 권력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최근 이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스타벅스 ‘탱크데이’ 논란에 줄줄이 나서 소비자의 선택권에 개입하고 형사처벌 운운하며 기업을 압박했다. 같은 기준대로라면 “탱크로 밀어버려야 한다”고 한 인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깨어난 세대의 분노

잠실 참정권 운동의 핵심은 청년 주체성이다. ‘잃어버린 세대’ 2030이 ‘깨어난 세대’로 각성하고 있다. 이들의 자양분은 분노지만, 그 분노는 1980년대식 이념 분노와는 한참 다르다.

이들은 거대 담론의 해방서사보다, 자기 삶의 기본 규칙이 깨지는 데 민감하다. 입시에서 공정성이 깨질 때 분노하고, 채용에서 특권이 작동할 때 분노한다. 부동산 사다리가 끊길 때 분노하고, 조세와 복지의 부담이 자기 세대에 전가될 때 분노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선거에서 가장 기본적인 투표절차가 흔들렸기 때문에 분노했다.

이번 잠실 참정권 운동의 성격은 ‘민주화 이후 세대가 민주주의의 절차를 자기 언어로 방어하기 시작한 사건’으로 요약된다. 이 운동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자발성, 청년, 축제성, 주체성 등이다. 과거의 시위는 조직, 지도부, 선동, 깃발이 중심이었다. 잠실 참정권 운동은 정치권이 청년을 따라간 사건이기도 하다. 이것이 잠실 운동의 도덕적 힘이다. 공통의 부당함을 감지한 청년 시민들이 느슨하게 연결되고, 현장에서 자기 질서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이 운동은 좌우를 막론하고 특정 진영의 전리품이 돼서는 안 된다. 참정권 운동을 ‘음모론 집회’나 ‘소요’로 몰아붙여서도 안 된다. 잠실 운동의 순수성과 확장성은 특정 정당의 깃발 아래 들어가는 순간 약해질 수 있다. 한 페이스북 크리에이터는 “청년들의 거룩한 저항을 내 진영의 전리품으로 가로채거나 ‘반정권 투사’라는 낡은 꼬리표를 붙이는 짓이야말로 지금 펜을 쥔 자가 저지르지 말아야 할 가장 무례한 폭력”이라고 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도 7일 페북에 “나도 이곳에서 한 명의 시민일 뿐”이라고 썼다.

◇청년들이 묻는다

이번 잠실 참정권 운동은 국가의 부재가 촉발한 21세기형 참정권 운동이며, 청년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주체로 등장한 시민적 각성 운동이다.

투표용지는 주권자의 현존 증명서다. 그 한 장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은 민주공화국의 예의가 무너진 사건이다. 대통령은 플라톤을 빌려 시민에게 정치 참여를 요구했지만, 잠실의 청년들은 플라톤보다 더 오래된 민주주의의 원칙을 국가에 되물었다. “주권자는 여기 있다.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전임기자, 행정학 박사

■ 용어설명

‘플라톤의 경구’는 플라톤의 책 ‘국가’(The Republic)에 나오는 구절로 현자의 정치 참여를 주문한 것. ‘국가’는 기원전 380년쯤 지어진 책으로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인 대화체로 작성됨.

‘만민공동회’는 구한말 열강의 이권 침탈에 반대하고 자주독립과 자유 민권 신장을 주장한 자발적 시민운동. 왕권의 무능과 서구 열강의 침탈에 맞서 민주주의를 보급하고 애국운동을 전개.

■ 세줄요약

아이러니한 정치 우화: 대통령의 투표 독려 직후 벌어진 투표용지 증발은 아이러니한 정치 우화임. 시민은 투표하러 갔는데 국가가 시민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대통령의 발언은 자신을 향한 부메랑이 됨.

21세기 만민공동회: 잠실 현장의 청년들은 투표용지 부족을 ‘참정권 침해’로 인식. 2030세대가 기성세대의 비겁한 침묵을 뚫고 자발적으로 분연히 일어난 것. 하지만 참정권 운동을 대하는 좌파의 인식은 참담함.

청년들이 묻는다: ‘잃어버린 세대’였던 2030은 지금 ‘깨어난 세대’로 각성 중. 참정권 운동이 좌우를 막론하고 특정 진영의 전리품이어서는 안 돼. 청년들의 물음은 ‘주권자는 여기 있다.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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