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한 '철의 도시' 아이젠슈타트, ‘하이든슈타트’를 꿈꾸며

아르떼 2026. 6. 9.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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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태남의 유럽도시 예술 산책
에스테르하지 궁정과 하이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에서 남동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아이젠슈타트(Eisenstadt)는 헝가리 국경과 접한 부르겐란트(Burgenland)주의 주도로, 인구 1만5천 명 남짓의 작은 도시이다. 시내 중심부에 들어서면 하이든 음악회 포스터가 유난히 많이 보인다.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100곡이 넘는 교향곡을 쓴 ‘교향곡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그렇다면 이 위대한 음악가가 어째서 이 작은 시골 도시와 그토록 깊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이 도시에서 중심을 이루는 건물은 헝가리계 명문 귀족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본산인 에스테르하지 궁(Schloss Esterházy)이다. 궁 안에 들어서면 하이든의 이름을 딴 음악당 하이든잘(Haydnsaal, 하이든 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궁 근처에는 그가 살던 집이 잘 보존되어 있고, 집 앞의 길은 ‘하이든 거리’라 불린다. 또 이곳 베르크 성당 안에는 하이든의 영묘가 있다.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안내 책자를 펼치니 “아이젠슈타트, 매력의 도시, 하이든 뿐만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문구가 먼저 눈길을 끈다. 역설적으로 이 문장은 오히려 이 도시에서 하이든의 존재가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말해준다. 하이든은 1761년부터 약 30년 동안 에스테르하지 궁정을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그의 대표적인 교향곡과 실내악 상당수가 바로 이 시기에 탄생했다.

‘아이젠슈타트(Eisenstadt)’라는 도시명은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철의 도시’라는 뜻이다. 하지만 실제의 아이젠슈타트는 이름이 주는 차가운 인상과 달리 평화로운 바로크풍의 시골 도시이다. 오래된 주택들, 느긋한 거리, 도시를 둘러싼 광대한 포도밭과 숲, 그리고 가까운 노이지들러 호수의 부드러운 풍경은 이 도시의 분위기를 더욱 온화하게 만든다. 이러한 풍경은 하이든이 살던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계절에 따라 반복되는 자연의 질서와 농촌의 느린 리듬은 그의 교향곡에서 느껴지는 균형감과 반복 구조 속에도 은근히 스며 있는 듯하다. 또한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문화가 교차하는 곳이었으며, 다양한 민속음악 전통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하이든의 음악 속에는 농민 춤의 소박한 리듬과 중부유럽 민속 선율의 흔적도 자주 나타난다. 그의 음악이 귀족적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따뜻하고 인간적인 이유 역시 이러한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든은 어떻게 해서 그토록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게 되었을까?

18세기 후반, 유럽 음악계는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가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기악 장르는 상대적으로 뒤로 밀려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오페라와 이탈리아 오페라의 우열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프로이센의 프리트리히 대왕은 베를린을 음악 중심지로 만들었지만, 그 역시 이탈리아와 프랑스 음악 취향에 깊이 빠져 있었다. 드레스덴 또한 화려한 이탈리아 오페라에 관심을 집중했다.

반면 오스트리아에서는 교향곡과 소나타 같은 새로운 기악 예술이 빠르게 성장했다. 당시 빈과 합스부르크 귀족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계층이 기악 음악을 즐겼고, 귀족들은 사설 오케스트라를 경쟁적으로 운영했다. 그들은 저택 안에 오페라 극장과 연주실을 만들 정도로 예술적 야심이 강했다. 이러한 귀족 가문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집안 중 하나가 바로 헝가리계의 에스테르하지 가문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이 가문은 막대한 재력과 권세를 자랑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하이든이 등장했다. 그는 젊은 시절 빈에서 무명 음악가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보헤미아 귀족 모르친 백작의 오케스트라를 맡게 되면서 비로소 상류사회와 접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오케스트라가 해산되자 모르친 백작은 하이든을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에게 소개했다. 이것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마침내 하이든은 1761년 5월 1일 에스테르하지 오케스트라의 부악장으로 채용되었다.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는 열정적인 음악 후원자였고 직접 바이올린과 첼로를 연주할 정도로 음악 애호가였다. 하이든이 그를 위해 처음 작곡한 대표작 중 하나가 <교향곡 6번>인데, 1악장 첫 부분의 아다지오는 떠오르는 아침 해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후에 ‘아침(Morgen)’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1762년 파울 안톤이 사망하자 동생 니콜라우스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 못지않은 문화적 야망을 가진 인물로 오케스트라 규모를 확대했고, 자신이 즐겨 연주하던 바리톤(Baryton)이란 악기를 위해 하이든에게 수많은 곡을 쓰게 했다. 하이든은 악장 그레고어 베르너(Gregor Werner)가 사망함에 따라 궁정악장이 된다. 그는 풍족한 급료와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았지만, 동시에 궁정이 원하는 음악은 무엇이든 작곡해야 했고 작품의 외부 유출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하이든은 니콜라우스가 사망한 1790년까지 충실히 봉사했는데, 그는 단순한 하인이 아니라 특권과 명예를 보장받은 ‘존경받는 궁정음악가’였다. 즉, 그가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에 속해 있었던 덕택에 그의 작품은 가장 권위 있게 외부에 알려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명성은 1780년경에 이르러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그가 아이젠슈타트를 떠난 후에는 자유로운 몸으로 더 넓은 세계에서 존경받으면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영국 런던에서는 그가 그곳에서 작곡하고 연주한 곡들이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궁정과 상류층으로부터 크게 환대받았다. 심지어 옥스퍼드 대학은 그에게 명예박사학위까지 수여했다. 그가 작곡한 12개의 ‘런던 교향곡’은 당시 영국에서 누리던 그의 인기를 반영한다. 그가 다시 런던에 갔을 때 영국 왕 조지 3세는 그에게 종신직을 제의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사양하고 말년을 조국에서 보내기 위해 빈으로 돌아와 불후의 명작인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작곡하고는 1809년 5월 31일에 빈에서 77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1년 후 그의 유골함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원에 따라 아이젠슈타트로 옮겨져 베르크 성당 안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는 마치 특급 성인을 위해 만든 것 같은 화려한 대리석 영묘이다. 그래서인지 하이든은 마치 수호신처럼 이 도시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 아이젠슈타트 사람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아이젠슈타트’라는 도시명을 아예 ‘하이든의 도시’라는 뜻의 ‘하이든슈타트(Haydnstadt)’로 바꿔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