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위대한 쇼맨’ 젠슨 황… 韓 뒤흔든 그의 노림수는?
SK·현대차·LG·네이버 등과 AI인프라 동맹
韓, TV·가전·車 세계 최고 제조역량 보유
피지컬AI 등 전방위 협력으로 ‘윈윈’ 전략

“내가 다음에 한국에 오면 나를 K-젠슨이라고 불러달라.” 젠슨 황(사진)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8일 정오쯤 서울대 해동첨단공학관에서 열린 ‘빌드어클로’(Build-a-Claw) 강연에서 “요즘은 무엇이든 앞에 K만 붙이면 인기를 얻는다”며 이 같이 말했다.
현장에 있던 1000여명의 학생들은 큰 환호로 화답했다.
지난 5일 방한한 황 CEO는 단 나흘 동안 대한민국을 뒤흔들 만큼 전례없는 광폭 행보를 보여줬다. 미국의 경제전문매체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억만장자 8위에 이름을 올릴 만큼 대부호지만, 대외 행보를 자제하는 국내 대기업 총수들과는 달리 황 CEO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가는 곳마다 마치 유명 연예인처럼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엄청난 일정을 짧은 시간 동안 소화했다. 입국 첫 날부터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 삼겹살 음식점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 등과 삼겹살과 소위 ‘소맥’을 같이 했고, 세계적인 프로게이머 ‘페이커’ 이상혁을 만났다.
갑자기 삼계탕 집에 가족들과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고, 국내 게임업계 수장 격인 김택진 엔씨 대표와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과는 PC방 회동을 했다. 프로야구 경기에 등장해 시구를 했고, PC방에서는 자신의 서명이 담긴 지포스 ‘RTX 5090’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일반 시민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이날도 최 회장과 구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이 의장,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 등과 연쇄 회동하며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한국의 치킨에 반하고 삼겹살을 즐기는 황 CEO의 이 같은 소탈해 보이는 행보가 사실 철저한 계산 하에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다. 황 CEO가 직접 나서서 엔비디아가, 한국 외에서 얻기 힘든 제조 AI 혈맹을 구축해 주도권을 이어가겠다는 복안이 담겨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로 황 CEO는 이번 한국 방문에서 제시한 핵심 키워드는 ‘인공지능(AI) 팩토리’였다. 이전엔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AI 메모리 수급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번엔 협력 범위를 AI 인프라 전반으로 확장했다.
이유는 한국이 가진 세계 정상 수준의 제조·정보기술(IT) 인프라 때문이다. 한국에는 세계 TV 시장 1위인 삼성전자와 생활가전 1위인 LG전자가 있으며, 세계 3위 자동차 기업인 현대차그룹도 있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삼성전자가 애플과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황 CEO는 실제로 오전 서울 종로구 SK서린사옥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만나 “한국보다 로봇 공학을 더 잘 준비한 나라는 없다. AI 인적 자원과 함께 한국의 제조업 분야 리더십 덕”이라며 “이 두 가지 역량의 결합으로 한국은 AI 다음 시대를 누리기에 가장 이상적인 국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의선 회장의 올 초 신년 메시지에서도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정 회장은 “피지컬 AI로 중심이 이동할수록 현대차그룹이 보유한 자동차, 로봇과 같은 움직이는 실체와 제조 공정 데이터 가치는 희소성을 더할 것”이라며 “이는 빅테크 기업들이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우리만의 강력한 무기”라고 말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작년 10월 방한 당시 치맥 회동-AI 비즈니스로 이어지는 ‘스토리텔링 일정’을 소화했다. 이번 방문에서는 삼겹살, 치킨, 야구 등 K-컬쳐로 영역을 확대했다”며 “AI 인프라 구축에서 한국 기업과의 관계를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 아니겠느냐”고 언급했다.
황 CEO는 여기에 한국에 엔비디아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도 구축해 일반 소비자 충성고객도 확보하려는 전략까지 더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엔비디아가 게임용 그래픽카드는 물론 AI칩 시장에서도 업계 최강의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최근에는 AMD와 구글, 인텔 등 경쟁사들의 거센 도전에 위협받고 있다.
사실 황 CEO의 이 같은 한국과의 ‘혈맹’ 구축 노력은 꽤 오랜 기간 이어져왔다. 황 CEO는 2000년대 초 여러 차례 용산 전자상가를 방문, 직접 고객사를 만나면서 GPU 영업을 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황 CEO의 이번 방한 행보는 고객사와의 친근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공고한 관계를 다지기 위한 일종의 ‘소프트 마케팅’ 격”이라며 “한국 기업들과 피지컬 AI 사업 확장, HBM 공급망 안정성을 다지기 위한 행보로 보여진다”고 밝혔다.
장우진·이상현·임주희 기자 wj1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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