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병' 재발 위기감 증폭 … 어린이 3명 중 1명 끼니도 못 챙겨
실물경제 침체에 빈곤층 급증
서둘러 무료급식 첫 전국 확대
인구 1400만명 식량 불안 겪어
물가 뛸때 실질임금은 안 올라
정규직 고용은 44개월째 위축
정치·경제 악순환도 첩첩산중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영국에서 결식아동 급증 등 '가난한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빈곤 이슈가 사회 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이란 전쟁까지 겹치자 고물가 속에 실물경제 정체로 인해 서민들이 직격탄을 맞았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재정 위기와 정치 불안이 지속되면서 개선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영국의 대표 빈곤 연구기관인 조지프론트리재단(JRF)이 지난 1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 내 빈곤 아동은 2023~2024회계연도 기준 450만명에 달했다. 이는 전체 아동의 약 31%로, 주거비를 제외한 가처분소득이 중위소득의 60%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 어린이가 10명 중 3명이 넘는다는 의미다. 이 수치는 2013~2014회계연도(370만명) 이후 꾸준히 증가해왔다.
이에 영국 정부는 지난 2월부터 무료 아침급식 프로그램을 처음 전역으로 확대했다. 전국 500여 개교에 무료 아침급식 클럽을 새로 도입하면서, 기존 시범 운영 학교 750곳을 포함해 총 1250곳에서 30만명 이상 학생이 혜택을 받게 됐다.
빈곤층도 늘고 있다. 영국 최대 푸드뱅크 네트워크인 트러스셀이 지난해 9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 내 식량 불안 인구는 약 1410만명에 달한다. 전체 인구의 약 20%, 5명 중 1명이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서민 삶이 팍팍해진 가장 큰 이유는 물가는 뛰는데 임금은 그만큼 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 통계청(ONS)에 따르면 올해 1분기 평균 임금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3.4%였지만, 물가를 반영한 실질임금 증가율은 0.3%에 그쳤다.
고용시장도 빠르게 식어가고 있다. 8일(현지시간) 회계법인 KPMG와 영국 채용고용연맹(REC)이 영국 채용업체 약 400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고용보고서에 따르면 5월 정규직 채용 지수는 44.1로 전월(47.5)보다 큰 폭 하락했다. 정규직 채용 지수는 44개월 연속 기준선인 50을 밑돌며 1997년 통계 작성이 시작된 이후 최장 위축 국면을 이어갔다. 이 수치는 채용업체의 신규 인력 모집 동향을 나타내는 확산지수로, 50을 밑돌면 고용 감소를 의미한다.
이처럼 서민들이 고물가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정부의 대응 여력은 매우 제한적인 수준이다. 국가부채가 급증하는 가운데 국채금리가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까지 치솟으면서 사실상 '부채의 덫'에 갇혔다는 분석이다.
김봉철 한국외대 국제학부 교수는 "1960~1970년대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경제가 파탄이 난 영국병이 다시 도지기 직전"이라며 "정치 불안이 금융·산업의 발목을 잡고 악화된 경제 상황이 다시 정치 부담으로 돌아오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국가부채는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영국 의회 경제 브리핑에 따르면 지난 4월 말 기준 공공부문 순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94.2%에 달한다. 2000년대 초 GDP의 30% 수준이던 부채 비율은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팬데믹, 에너지 위기를 거치며 3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영국의 순부채 비율이 2028년 96%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선진국 평균인 83%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국채시장 불안은 더 심각하다.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최근 5.1%를 넘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를 찍었고, 30년물 국채금리도 1998년 이후 최고를 기록했다. 투자자들이 영국 자산에 경계심을 높이고 있다는 신호다.
높아진 금리는 곧바로 재정 부담으로 이어졌다. 현재 영국 정부의 연간 부채 이자 지출은 1000억파운드를 넘어, 국민보건서비스(NHS)를 제외한 모든 공공서비스 예산을 합친 것보다 많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부담이 2030~2031회계연도에는 GDP의 약 4%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 이전의 두 배 수준이다.
정치권의 불확실성도 시장 우려를 키우고 있다. 애초 국채시장 불안 자체가 정치권 실책의 결과물이다. 2022년 당시 리즈 트러스 총리의 대규모 감세안인 '미니 예산안' 발표 이후 국채시장이 붕괴 직전까지 몰리면서 트러스 총리는 취임 49일 만에 사퇴했다.
현재 키어 스타머 정부의 레이철 리브스 재무장관도 지난해 예산안에서 연간 320억파운드 규모의 추가 차입 계획을 발표했다가 시장 반발에 직면했다. 정책이 발표된 직후 국채금리가 급등하고 파운드화 가치가 떨어지자, 정부는 서둘러 증세·지출 억제 기조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 리더십 공백은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의 통화정책 운신 폭마저 좁혔다. 전혜원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교수는 "파운드화를 사용하는 영국은 재정·통화정책 측면에서 완충 역할을 해줄 장치가 부족하다"며 "정책 실패나 시장 충격이 생기면 그 영향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김제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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