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균, 자신이 혁명이었던 좋은 의사…그의 웃음·분노·열망은 남아

한겨레 2026. 6. 8.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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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이상윤 공동대표 제공

우석균(1962~2026.6.7) 선생이 오랜 투병 끝에 우리 곁을 떠났다. 의사였으나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못해, 이른 나이에 병을 얻어 갔다. 나는 그의 후배다. 그는 ‘좋은 의사'였다. 좋은 의사에 대한 정의와 생각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그는 좋은 의사였다. 환자 이야기 듣기를 즐겼고, 환자의 고통에 함께했다. 어떤 환자도 차별하지 않았고,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환대했다. 그는 ‘명의'였다. 사석에서 자주 지역에서 다른 의사가 놓친 진단을 찾아내곤 기뻐했다.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면 그가 하는 노동을 묻는 몇 안 되는 의사였고, 다른 병·의원에서 비싸게 받는 처치를 돈을 받지 않거나 싼값에 해주는 의사였다. 그는 자주 동료 의사들과 특정 건강 문제나 의료 행위의 의학·과학적 근거를 두고 토론하며, 더 나은 처치를 고민하는 의사이기도 했다.

그는 의사들의 양심과 사회적 기능을 신뢰했다. 학생운동 이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활동을 하며 ‘의약분업’과 같은 의사들의 단기적 이해관계와 맞설 수도 있는 일에 나서기도 했고, 그 때문에 ‘반의사'적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의사들을 사랑했다. 의사들이 진정 환자를 위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 긍정적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끝내 버리지 않았다. 사랑과 기대가 컸기에 때로 분노도 컸지만, 그는 사람의 고통을 줄이는 의료 행위가 사회에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언제나 믿었다. 나는 그의 이러한 신념을 때때로 이해하지 못했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는 그런 나를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의사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최근 의사들의 ‘태업'과 ‘직장 이탈'은 그런 그에게 큰 상처였다. 그가 말기암 환자가 되기 시작했던 무렵의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의사들이 다른 방식으로 교육되고 훈련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상윤 공동대표 제공

하지만 ‘좋은 의사’라는 것은 그를 설명하는 절반도 되지 못한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열정적인 사회운동가였다.

건강과 의료 공공성이 걸린 사회적 의제 가운데 그가 개입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료민영화 반대, 공공의료, 무역협정의 대상이 된 먹거리 안전에 대한 그의 활동은 잘 알려져 있다. 그뿐 아니라 반전운동, 탈핵운동, 환경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기후위기 대응 활동, 인권운동 등, 사회운동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건강과 관련된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그는 나섰고, 뛰어난 논리와 열정적인 웅변으로 언제나 그 운동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현장의 실천가일 뿐 아니라, 운동의 전략과 전술, 나아가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고자 애쓰는 이론가이기도 했다. 사회운동이 위기에 처하고 방향을 고민할 때마다 후배들은 그에게 판단을 물었고, 그의 판단을 신뢰했다. 그리고 그 판단은 현실의 운동 속에서 자주 올바름이 입증되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고 일부 운동 사회에서는 정권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없던 윤석열 정권 초기부터 권력의 핵심에서부터의 극우화와 권위주의화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하고 사회운동이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평가가 긍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로 평가되기를 바랐다.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에 누구보다 정통했고, 그 사상을 왜곡하거나 폄훼하는 이들을 멀리했다. 그리고 그 사상에 따라 노동계급의 혁명적 실천의 힘을 믿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활동이 노동계급의 혁명 투쟁에 밑거름이 되기를 바랐고, 실제로 그러했다. 그는 낭만적 정서의 신봉자이기도 했다. 복고 지향적이고 보수적인 의미에서의 ‘낭만'이 아니라,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힘을 품은 비판의 정서로서 ‘낭만'이라는 점에서 그는 낭만주의자였다. 어슐러 르 귄을 비롯한 에스에프(SF) 소설의 진정한 애독자였던 그는 음악을 사랑했고, 문학을 이야기하며 동료들과 어울려 놀고 수다 떨기를 좋아했다. 학생 때부터 그와 함께한 이들은 그가 “예술가 기질”을 가졌다 말했다. 술에 취하면 피아노와 기타를 치던 그의 예술가 기질이 가끔은 무절제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래서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그 기질 탓에 뛰어난 이론적 식견과 명철한 판단력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이론서 한권 내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그러나 그가 써낸 수많은 사회 변혁을 위한 정세적 글들은 그 자체로 현재적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

2021년 10월 한겨레와 인터뷰하는 고인. 한겨레 자료사진

탁월했지만, 여유를 잃지 않았고, 동시에 자기 삶의 역사적 지평을 놓지 않았던 그가 더는 우리와 함께 사회 변화에 나설 수 없다는 일은 사무치게 슬픈 일이다. 하지만 그를 기리는 길은, 그가 생전에 늘 바라던 것처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투쟁들이 결코 가려지거나 멈추지 않도록 하는 일이며, 그가 싸웠던 자리에서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계속 싸워 나가는 것일 테다. 그가 남긴 웃음, 그가 남긴 분노, 그가 남긴 사회 변화의 열망들은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새로운 관계와 의지를 일구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런 관계들 속에서, 그런 투쟁의 한가운데에서 자주 우리는 그를 다시 만날 것이다.

그는 그의 이름으로 된 제대로 된 저서 하나를 남기지 못하고 떠났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자신이 곧 혁명이었으므로. 우리들의 선배이자 스승이었던 동지여, 잘 가시라. 그가 늘 애정을 표하던 르 귄의 문장으로 그를 보낸다.

“주지 않은 것은 받을 수 없는 것이지요. 당신들은 스스로를 주어야만 합니다. 혁명은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당신들 스스로가 혁명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혁명은 당신들의 영혼에 있거나, 아니면 어디에도 없습니다.”(어슐러 르 귄 ‘빼앗긴 자들’)

이상윤/노동건강연대 공동대표·직업환경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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