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첫 걸음은 늑대바위 공략부터 [강의실에서 히말라야로 ④]

이수환 부산대 산악부(22학번) 2026. 6. 8.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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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역 대학산악부 연합 히말라야 원정대의 훈련 일기
책상 앞 행정 전쟁
부산 금정산 부채바위 북벽에서 등반 훈련 중인 필자.

원정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두 달. 출국일이 다가올수록 훈련 강도는 자비 없다. 9회차를 맞은 이번 훈련의 목적은 화려한 등반 기술이 아니었다. 어쩌면 고산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버티는 힘', 즉 무식한 하중 훈련과 장거리 운행 능력을 시험하는 자리였다

부산 백양산에서 시작해 엄광산과 구덕산을 거쳐 승학산까지 넘고 돌아오는 무자비한 종주 코스를 확인한 전날 밤부터 걱정에 잠을 설쳤다. 성인 남성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가벼운 체구 탓에, 나는 고중량 하중 훈련이 가장 어렵다.

체급이라는 핑계를 제쳐두고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고 싶지만, 막상 공용 장비와 식량을 꽉꽉 채워 넣은 배낭을 저울에 올려보니 내 몸무게의 절반에 육박했다. '그래, 까짓것 해보지 뭐'하며 호기롭게 출발을 외쳤지만, 알량한 자신감이 바닥나는 데는 고작 1시간이면 충분했다.

부산 백양산~엄광산~구덕산~ 승학산을 넘는 하중훈련의 시작이다. 각자 20kg이 넘는 배낭을 멘 원정대원들의 발길이 무겁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새벽부터 굵은 비가 쏟아졌다. 산행을 시작할 무렵 빗줄기는 조금 잦아들었지만, 나뭇잎을 타고 흐른 차가운 물방울이 끊임없이 얼굴을 때렸다. 빗물을 머금어 돌덩이처럼 무거워진 배낭을 메고 걷다 보니 체온 조절에 비상이 걸렸다. 비바람에 젖은 몸이 덜덜 떨리다가도, 급경사를 오를 때면 비옷 속으로 뜨거운 열기가 가득 차 찜통이 따로 없었다. 습하고 꿉꿉한 환경 속에서 옷을 입고 벗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체력은 급격히 갉아 먹혔다.

원정대에 뒤늦게 합류한 몇몇 대원들의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여기서 나마저 뒤처질 수는 없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며 꾸역꾸역 백양산 정상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승학암에서의 등반 훈련. 하켄 설치와 이퀄라이징을 배우고 있다.

오늘 목표의 3분의 1쯤 왔을 무렵, 등산화 안에서 서늘하고 불길한 감각이 엄습했다. 겨울 내내 빙벽 등반을 하느라 계속 부딪혀 새까맣게 피멍이 들었던 왼쪽 엄지발톱이었다. 질척이는 양말 안에서 끝없이 마찰하더니, 기어코 뿌리부터 덜렁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발끝이 욱신거렸지만, 괜한 자존심에 입을 꾹 다물고 또 하나의 봉우리를 넘었다.

늑대바위를 향한 "깡 깡" 소리

저녁 8시 무렵,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야영지에 도착해 벌러덩 누워버렸다. 텐트 안에서는 비에 젖은 장비의 냄새와 하루 종일 산길을 구른 탓에 거의 발효되다시피 한 발 냄새가 기묘한 조화를 이뤘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식사를 흡입하고 나자, 밀린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죽어버린 발톱의 통증마저 잠재울 만큼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PK39봉우리에서 난코스 중의 하나로 꼽히는 늑대바위. 푸석 바위인데다 확보할 곳이 마땅치 않다.

하중 훈련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대원들이 다시 모였다. 이번에는 하켄 설치와 확보지점 구축 시스템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목표로 삼고 있는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미등정봉(사람이 오른 적 없는 봉우리) 'PK39'는 설벽과 얼음, 바위와 흙이 뒤섞인 변덕스러운 혼합 지형이다.

특히 베이스캠프를 지나 우리 앞길을 가로막고 있을 500m 높이의 거대한 직벽 구간, 일명 '늑대바위' 공략이 이번 원정의 핵심이다. 늑대바위는 제대로 된 확보점이 전무한 데다 암질조차 푸석하게 썩어 있어, 등반 난이도 자체보다 '어떻게 안전한 확보점을 만들 것인가'가 성패를 가를 구간이다.

뒤쪽 가장 높게 솟은 봉우리가 PK39 정상이다. 동아대산악회에서 두 번 도전해 실패한바 있다.

바위틈에 직접 하켄을 때려 박아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망치질 소리가 "깡, 깡" 하고 울려 퍼질 때마다, 하켄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며 내는 소리의 피치가 조금씩 변하는 게 무척 신기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실제 원정에서는 내가 박은 이 작은 금속 조각 하나에 모든 동료의 목숨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기 때문이다.

산 아래에서 치르는 행정 전쟁

그동안 대학 산악부 생활을 하며 멀티피치 등반을 할 때는 대부분 미리 설치된 볼트에 의지해 왔다. 다이니마 슬링과 잠금 카라비너만 있으면 어디서든 편하게 확보지점을 만들 수 있었던 '온실 속 등반'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무것도 없는 벽에 스스로 길을 내고 생명줄을 박아 넣어야 하는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은, 가장 기본적인 걸음마부터 다시 배우는 듯한 당혹감과 긴장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원정준비 모임. 인도어클라이밍을 하며 등반 루트를 공부 중이다.

원정이 한 달 반 남짓 남은 시점, 본격적인 출국 준비를 위해 모든 대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다 같이 비자 신청서를 쓰고 단체복을 입어보며 잠시 들뜬 기분도 만끽했지만, 곧장 대장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식량 계획서가 이게 뭐고."

특히 장비와 식량파트 대원들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행정 작업에 대원들은 꽤 힘겨워했고, 맨땅에 헤딩하듯이 하나하나 배워 나가는 과정은 산을 오르는 것만큼 힘든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훈련을 위해 매주 2~3회씩 함께 산으로 향하는 대원들. 원정대 공식 훈련 외에도 별도로 대원들이 만나 훈련 산행과 등반을 한다. 부산지역 대학산악부 재학생들을 주축으로 6,000m대 미등봉인 PK39 원정대가 꾸려졌다.

그럴 때마다 졸업생 선배들의 압도적인 경험은 구원의 손길이었다. 막히는 일이 생길 때마다 조벽래 선배의 머릿속에서는 마치 백과사전에서 정답을 뽑아 쓰듯 수십 년간 쌓인 노하우가 튀어나왔다. 대학생 신분으로 학업과 원정 준비를 병행하며 마주하는 현실적인 벽은 예상보다 높고 단단했다. 장비 목록을 대조하고 식량의 칼로리를 계산하는 이 지루한 서류 작업들이 때로는 무거운 배낭보다 더 우리를 지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산 아래에서 겪는 이 치열한 준비작업 또한 결국 원정의 일부였다. 서류파일 더미 속에 파묻혀 고민하는 시간이 모여 히말라야의 차가운 눈 위에서 우리를 지탱해 줄 가장 단단한 하켄이 될 것임을 믿는다. 상처투성이 발톱과 욱신거리는 어깨, 그리고 산더미 같은 보고서들. 이 모든 어지러운 조각들이 서서히 하나의 목표, PK39의 정상을 향해 정렬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이 지루한 서류 더미와 진흙탕 훈련의 시간들이, 히말라야의 고산 위에서 우리를 버티게 할 가장 든든한 생명줄이었음을 증명해 낼 것이다.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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