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새 35억弗...기업들 달러 쌓아두는 이유는
2분기 평균환율 IMF 이후 최고
수입대금 등 외화 유동성 확보
“환율 추가상승 대비 차원” 분석

원·달러 환율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달러당 1560원을 넘어선 가운데 기업들의 달러예금이 영업일 기준 사흘 만에 35억 달러 가까이 급증했다. 외국인투자가의 국내 주식 매도와 미 국채금리 상승이 원화 약세를 자극하는 상황에서 수출기업들이 벌어들인 달러를 원화로 바꾸지 않고 쌓아두는 흐름까지 겹치며 외환시장 수급 불안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8일 금융계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의 4일 기준 법인 달러예금 잔액은 533억 9000만 달러로 지난달 말보다 34억 6100만 달러 증가했다.
영업일 기준 사흘 만에 5조 3900억 원가량의 달러예금이 불어난 셈이다. 지난해 말 524억 달러 수준까지 늘었던 법인 달러예금은 고환율 국면에서 당국의 직간접적인 관리가 이어지며 올 3월 말 447억 2200만 달러까지 줄었다. 하지만 4월 말 480억 달러대로 다시 올라선 뒤 5월 말 499억 2000만 달러를 거쳐 이달 들어 증가 폭이 한층 커졌다.
개인의 움직임과도 대조적이다. 3월 말 124억 9600만 달러였던 5대 은행의 개인 달러예금은 이달 4일 121억 7100만 달러로 3억 2500만 달러 줄었다. 같은 기간 법인 달러예금이 86억 6800만 달러 늘어난 것과 정반대 흐름이다. 달러 강세에 개인은 일부 차익 실현에 나선 반면 기업은 추가 환율 상승에 대비해 달러 보유를 늘린 것으로 풀이된다.
금융감독 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환율은 심리인데 원화 추가 약세를 예상한 기업들이 수출 대금으로 받은 달러를 환전하지 않고 예금으로 두고 있다”며 “투자 대기 자금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환율이 더 오를 수 있다고 보고 굳이 원화로 바꾸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시장 불안도 커지고 있다. 서울 외환시장에 따르면 6일 야간 거래에서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1561.5원까지 치솟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3월 6일 장중 1597.0원을 기록한 이후 17년 3개월 만의 최고 수준이다. 같은 날 오전 2시 마감가는 주간 거래보다 19.9원 오른 1559.0원이었다.
평균 환율도 이미 고공 행진 중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분기 들어 이달 5일까지 원·달러 환율 평균은 주간 거래 종가 기준 1490.98원으로 1998년 1분기 1596.88원 이후 약 28년 만에 가장 높다. 올해 평균 환율도 1477.06원으로 역대 최고치였던 지난해 평균 1420.97원을 웃돌고 있다.

원화 약세의 배경으로는 외국인투자가의 대규모 주식 매도, 미국 국채금리 상승, 달러 강세, 역외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의 변동성이 함께 거론된다. 올 들어 외국인투자가는 국내 주식을 118조 원 넘게 팔아 치웠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우려가 다시 커지며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이 제기되고 미 10년물 국채금리가 연 4.5% 안팎에서 움직이는 점도 원화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기업 달러예금까지 외환시장 수급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출기업이 해외에서 받은 달러를 원화로 바꾸면 시장에는 달러 공급이 늘어난다. 반대로 기업들이 환전을 미루고 달러를 예금으로 쌓아두면 시장에 풀리는 달러가 줄어 환율 상승 압력이 커질 수 있다.
김진욱 한국씨티은행 한국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수출 금액 자체가 과거보다 커진 만큼 수출기업의 원화 환전 규모도 늘고 있다”며 “다만 벌어들이는 달러가 더 크게 늘면서 환전 이후에도 기업들이 보유하거나 예금으로 남겨두는 달러 규모가 함께 커지는 흐름”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 규모가 커지며 기업들이 벌어들이는 달러도 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1분기 경상수지 흑자는 744억 달러로 중국에 이어 전 세계 2위였다. 이민혁 KB국민은행 이코노미스트는 “환율 변동성이 커진 상황에서 수출 업체들도 환전을 미루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환율 상승세가 이어질 경우 수입물가와 시중금리에도 부담이 커질 수 있다. 고환율은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 부담을 키우고, 이는 내수 기업과 취약 계층의 비용 압박으로 이어진다. 금융 당국이 법인 달러예금 흐름을 예의 주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분간 원화 약세가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NH농협은행은 3분기까지 외국인의 주식 순매도가 이어질 경우 약 150조 원의 자금이 추가로 빠져나가 원·달러 환율이 1590원대까지 오를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낙원 NH농협은행 FX파생전문위원은 “시장 수급이 매수 쪽으로 쏠려 있어 환율 상단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고점인 1590원대까지 열어둬야 한다”며 “하반기에도 환율이 1470~1600원 사이에서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환율 추가 상승에 대비해 기업들이 원자재 결제나 해외 송금, 투자 자금 용도로 달러를 확보하려는 것”이라며 “법인의 달러예금이 시장에 충분히 풀리지 않으면 환율 상승 속도가 더 빨라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신중섭 기자 jseop@sedaily.com정지원 기자 stopo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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