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보다] “공부는 빛이다” - 장애인, 늦게 도착한 배움

손은혜 2026. 6. 7.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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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전국 최초로 성인 장애인을 위한 초등 학력 인정 과정을 만든 질라라비야학. 여기서 중년이 돼서야 학교에 처음 와봤다는 중증 장애인들에게, 배움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인터뷰> 양판길(50)/ 중증 뇌병변 장애·야학 10년차
나에게 공부는 빛이다. 공부를 하게 되면 아는 것도 많아지고 생각이 넓어지니까 빛날 수 있잖아요. 빛이 나니까 별이라고 생각합니,다 별.


장애인들에게 배움이란 무엇일까. 이곳에서 질라라비 야학의 학생회장이나, 중증 장애인 이상근 씨의 하루를 따라가봤습니다.

몸이 불편했던 상근 씨에게 어린 시절의 학교는 무섭고 억울한 상처뿐인 곳이었습니다.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땐 학교를 그만둬야 했고. 열다섯 살엔 한 장애인복지시설로 보내졌습니다. 여러 시설을 전전하는 동안에도 시련이 끝나지 않았고, 견디다 못해 결국 도망쳤습니다.

자립생활을 시작하고 장애인들을 위한 배움터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그의 나이 마흔 살. 그때부터 진짜 배움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공부했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 학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꿈을 꿉니다.


<인터뷰> 이상근/ 중증장애인
국문학을 하고 싶어서요. 시를 쓰고 싶어요. 사람들이 한 얘기하고, 내가 쓴 거 하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상근 씨는 일주일에 이틀 이 야학의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번 돈은 적금을 붓습니다. 배움이 일이 되고, 일을 통해 자립을 꿈꿀 수 있는 곳. 그에게 이 야학은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야학에는 상근 씨처럼 사오십이 넘어 처음 학교에 온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장애가 있어 배움의 속도는 느려도, 공부가 본인들의 삶을 아름답게 해 준다고 믿습니다.

<인터뷰> 류정혜 (56)/ 중증 지적장애/ 야학 5년 차
우리 장애인들은 공부하면 잊어버리고 뭐 했는지를 잘 몰라요. (그래도) 공부해서 알아듣고, 배워서 남한테 전달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배워야죠.

20년 넘게 이곳을 지켜온 교장 선생님, 조민제 씨는 이렇게 소회를 말했습니다.
<인터뷰> 조민제/ 질라라비 장애인 야학 교장
‘저 햄버거 처음 먹어 봤어요.’ 하시는 거예요. 40대 50대가 돼서 패스트푸드점을 처음 가봤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한국 사회에서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인데... 주민센터를 방문하더라도 서류 한 장 발급하는 데 사시나무 떨듯 손을 떠는 분도 계셨거든요. 그런데 글자를 배우고 꿈이 생기는 거죠.

그런 포부와 달리 많은 이들이 번번이 현실의 벽에 멈춰야 했습니다. 지난 2022년, 교육부는 성인 장애인도 문해교육과정을 이수하면 초등·중학 학력을 인정받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일부 평생교육시설에선 수업을 들으면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장애인들이 이런 학교를 다니긴 어렵습니다. 남은 길은 검정고시 하나. 중증 장애인이나 발달장애인에겐 너무 높은 벽입니다. 사실상 고등학교에서, 교육의 사다리가 끊기는 셈입니다.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고열로 뇌병변 장애를 얻은 조상지 씨도 마찬가지.

상지 씨는 한 장애인 시설에서 15년을 보냈습니다. 시설에서 나와 자립한 지 17년째, 상지 씨는 여전히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본인만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야학에 다니며 공부하고, 글을 써 신문에 기고하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첫 영화의 제목은 ‘장애인, 왜 배워야 하나’였습니다.


<인터뷰> 조상지
장애인 야학은 늦게 도착한 시민권의 학교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내가 배우고, 말할 수 있고, 관계 맺을 수 있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도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야학에서 시작된 배움은 그녀의 삶을 바꿔놨습니다. 상지 씨는 6·3 지방선거에 서울시의원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시설에 갇혀 ‘없는 사람’ 취급받던 그녀가, 정치에 직접 나서고, 장애인 정책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적극적인 사람이 된 겁니다.

장애인 평생교육시설은 전국에 130여 곳. 절반 정도는 수도권에 몰려 있습니다. 장애인들에게는 어디에 살고 있느냐가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지를 결정합니다.


정부 조사결과를 보면 장애인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학력이 중졸 이하입니다. 장애인의 평생교육 참여율은 2.4%로, 전체 국민 평균과 비교해 매우 낮습니다.


이런 현실을 극복해 보고자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서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법안이 발의된 지 4년여 만인 지난해 10월, 장애인평생교육법은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장애인 평생교육을 국가와 지자체의 책무로 명시하고, 장관이 기본 계획을, 지자체장이 시행계획까지 세우도록 했습니다. 국가와 지자체 단위로 장애인 교육 시설도 만들도록 정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장에선 불안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입니다.

<인터뷰> 김기룡/ 중부대학교 중등특수교육과 교수
국가가 장애인 시설에 예산을 직접 지원해 줄 수 있다는 최소한의 근거를 만들긴 했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예산을 직접 교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마 많은 논의가 좀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건 정부 의지도 필요하고 아마 기획재정부 기획예산처 동의도 필요한 부분일 것으로 보입니다.

예산 지원은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임의조항입니다. 지키지 않아도 벌칙이 없으니 지자체 의지에 따라 장애인 평생교육은 천차만별로 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절박한 이들이 이 법의 보호 대상에서 빠졌습니다.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평생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돌봄이라고 판단하고, 지원 대상에서 제외한 겁니다.


발달장애 자녀들의 부모에게도, 자식 교육은 타협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발달장애인 교육에 예산을 쓰는 것은 낭비라는 편견, 가르쳐도 변화가 없다는 조롱과 싸워왔습니다.

<인터뷰> 김숙경
(가르쳐서 뭐하냐는) 그런 의견은 정말 무식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강아지도 가르치면 다 하잖아요. 우리는 사람이에요. 우리 아이들도 사람이에요. 당장은 잘 못해요. 그런데 꾸준한 교육을 통해서 우리 친구들은 그것을 해내더라고요.

관계자들은 발달장애인들이야말로 평생을 배워야 살아갈 수 있는데, 그들을 위한 교육이 이번 법으로 보장되지 못한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지적합니다.
<인터뷰> 정은중/ 구리시 발달장애인평생교육센터장
발달장애인분들에게 교육과 돌봄을 따로 분리해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거든요. 법에서 명시가 되지 않으면 어려움이 생기죠. 제일 큰 어려움은 우선 소속에 대한 근거가 없다. 그리고 재정적인 지원이라든가.

공부하는 것, 누군가를 만나는 것,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배우는 것. 누군가에겐 이 당연한 권리가 일생을 두고 싸워내 얻어야 하는 행운이었습니다. 배움이 특별한 행운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될 때까지 상근 씨도, 상지 씨도 배우고, 또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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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손은혜
촬영:조선기, 강우용
편집:이기승
그래픽:윤예슬
리서처:홍민지
조연출:엄희주, 심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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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혜 기자 (grace35@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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